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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pr 19. 2016

스마트폰이 되고 싶어요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꽃은 만개해 있지 않았다. 성질 급한 몇몇 나무만 꽃을 틔웠을 뿐이었다. 그래도 빨간 그 모습이 예뻐 보여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아직도 멋진 경치를 보면 치유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놈의 주술. 이제 이런 기대는 그만하자. 결국 교토에서의 한 달은, 외부에서 무언가를 얻으려 했을 때에는 실패했고, 바라지 않았던 순간에 얻었다. 쓰고 나니 너무 당연하지만 그랬다. 당연함에 항복하는 매일이다. 이렇게 별 극적인 일 없이 한 달이 끝나는구나, 생각하며 절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갔다. 
<오지은 ‘익숙한 새벽 세시’를 읽다가>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그날은 2001년 이후 가장 추웠던, 체감 온도는 영하 29도였다. 영하 14도 일 때 출근을 했는데 허벅지가 시렸다. 나름 기모로 된 바지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아우터를 입은 위쪽과 달리 다리가 너무 추웠다. 발이 시린 건 두 말할 필요 없고. 그런데 영하 20도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다행히 그 젤 춥다는 날이 토, 일 주말이었다. 코감기 때문에 두 달 이상 고생하고 간신히 나은 아이를 또다시 감기에 걸리게 할 순 없다 생각하여 꼼짝 말고 집에 있자고 작정했다. 보일러의 희망온도를 25도로 맞춰 놓고 3시간 간격으로 돌아가게 설정했다. 집은 훈훈했다. 어른은 살짝 더울 정도. 아이를 위해서 벅차오르는 기름값도 잊은 채 계속 보일러를 돌렸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출근길엔 눈이 왔고 기온이 제법 올라갔다. 그래도 춥긴 추웠다. 한강이 얼었으니까.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당산철교를 건너는데 보지 않아도 눈부신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봤더니 꽁꽁 언 한강 물길 위로 눈이 소복이 내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길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3분가량 아무 생각 없이(아니하지 못하고) 멍해져서 눈을 눈에 고정시켰다. 길에 쌓인 눈이 아니라 강 위에 눈이 쌓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모든 게 순간 멈춤이었다. 그 사이에도 전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이 멋진 풍경은 금세 눈 앞에서 사라질 터라 휴대폰을 꺼낼 틈도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 합정역에 도착하고 나서야 휴대폰으로 사진을 남겨두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페이스북을 열었다. 역에서 빠져나와 사무실까지 7분 정도 걷는데 손이 좀 시렸지만 늘 그렇듯 마냥 보게 되었다. 그러다 내 뒤통수를 크게 때리는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휴대폰이 되고 싶어요”

읽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감이 왔다. 읽으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질 것 같았지만 매를 맞기로 했다. 잘못이 뭔지 뻔히 아는 데 확인하고 싶은 이유는 뭘까.
싱가포르의 한 여교사는 ‘내 소원은’이라는 주제로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줬다. 그날 밤 그녀는  숙제 검사를 하다 말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중 한 아이가 써낸 글 때문이었는데, 좀 길지만 옮겨본다.

“내 소원은 스마트폰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스마트폰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죠. 아빠 엄마는 스마트폰에만 너무 신경을 써 가끔 날 돌보는 것을 잊습니다. 아빠가 지쳐서 퇴근했을 때 내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시간을 보냅니다. 아빠 엄마가 어떤 중요한 일을 하다가도 벨소리가 울리면 단 한 번만에 전화를 받지만 내가 울 때는 그렇게 해주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게임을 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와 말할 때 내가 뭔가 전할 말이 있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바람은 스마트폰이 되는 것입니다.” 


illust by 곽명주


    더 놀라운 건 글을 쓴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 글을 읽자마자 집에 있는 10개월짜리 아들과 오버랩되면서 그간 아이를 앞에 두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던 내 모습이 쓱쓱 지나갔다. 아이는 휴대폰만 보면 잡으려고 애를 썼다.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아이는 방바닥에 놓인 휴대폰만 보면 필사적이었다. 휴대폰하고 맞먹는 아이템이 리모컨인데 집요하도록 그 두 가지만 보면 눈이 뒤집혀 재빨리 내 눈을 피해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엄마와 아빠가 그 두 가지에 집착하니까. 아이도 그게 뭔지 무척이나 궁금했을 것이다. 비록 잡는 순간 입으로 들어가는 불상사가 나타나지만.
나는 아이를 재울 때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래서 더욱더 아이를 볼 때 휴대폰을 챙기는 편이었다,라고 하면 변명이겠지. 얼마나 휴대폰만 들여다봤으면 아이가 휴대폰이 되고 싶다고 했겠는가. 비록 내 아이가 한 말이 아니지만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숨고 싶어 진다.
벨소리에는 즉각 반응하지만 자신의 울음소리에는 반응하지 않고 자신과 게임하는 대신 휴대폰과 논다는 말에 나 또한 전화벨만큼 아이에게 반응한 적이 있었나 싶다.


반성. 반성. 반성.


    아무도 밟지 않은 강 위의 눈길처럼 내 아이도 깨끗하고 조심스럽다. 그저 밝게 키우고 싶다. 행복을 표현하고 기쁨을 만끽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눈 앞으로 뭐가 지나가는지 모르는 아이가 아닌 고개를 들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눈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줄곧 어떤 메시지도 오지 않는데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휴대폰부터 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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