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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pr 11. 2016

각질 없는 척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피부 표면은 바싹 마른 점토 같고 미간과 입 주변이 쩍쩍 갈라져 가뭄이 든 논바닥 같았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금은 옷 때문에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서유미 ‘당분간 인간’을 읽다가>




    내가 다니는 회사는 출근 시간을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8시 9시 10시 11시, 이렇게 4개 시간대의 출근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원하는 시간에 출근하되 퇴근을 그만큼 늦게 또는 빨리 하면 되는 탄력근무제. 나 같은 워킹맘에게 매우 좋은 복지제도가 아닐 수 없다. 평소 나는 9시 출근해 6시 퇴근을 하는데 오늘은 회사 근처에서 저녁 7시 반에 약속이 있어 1시간 늦게 출근했다. 그러니까 10시 출근해 7시 퇴근으로. 1시간 늦은 지하철이 좀 한산할까 싶었지만 그 시간에도 사람은 꽤 많았다. 맞다. 남편 아이들 회사, 학교 보내고 아주머니들이 볼일 보러 나가는 그 시간대이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겨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는데 9시 출근일 때는 못 만나던 지하철 상인을 마주쳤다.
사지는 않더라도 뭘 파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인 지하철 상품. 오늘은 지하철에선 처음 접하는 물건이었는데 그게 바로 각질제거기. 저쪽에서부터 아저씨가 물건을 흔들며 걸어오는 내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거 광고에 나오는 겁니다. 지금 TV에서 광고하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광고하는 각질제거기와 포장재까지 매우 흡사하게 생겼지만 그 상품일 리 없었다. 이윽고 통로 가운데 자리를 잡은 아저씨는 어디선가 플라스틱 페트병을 꺼내더니 면도기처럼 생긴 그 각질제거기로 페트병 표면을 갈기 시작했다.
“발을 물에 불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갈아 주세요. 힘 들일 필요도 없어요. 그냥 이렇게 갖다 대기만 하면 됩니다. 어때요? 하얗게 가루 날리는 거 보이시죠?” 눈부신 아침 10시의 햇살이 차창 안으로 비춰 들며 환상의 빛처럼 하얀 가루가 잠시 공간을 부유했다.

illust by 곽명주


    가을부터 겨울, 아니 길게는 봄까지.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난 발 각질 때문에 스트레스가 좀 많은 사람이다. 이게 살짝 유전적인 영향도 없지 않은데 친정엄마, 그리고 외할머니도 발 각질 때문에 고생 좀 하셨다. 매번 로션을 바르고 오일을 발라줘도 강력한 건조함이 그 모든 걸 빠르게 흡수해 금세 갈라지고 각질이 일어났다. 그러던 나는 스위치를 켜고 돌돌돌 갈기만 하면 되는 이 각질제거기가 꼭 갖고 싶었는데 시중에서 4, 5만 원 하는 적지 않은 가격 탓에 선뜻 사기가 망설여졌다. 근데 마침 이 아저씨를 만나게 된 것.
이건 운명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의 집중이 두려운 걸까,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설명을 다 마친 아저씨는 새 제품을 몇 개 들고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며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라고 했지만 난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제품을 만 원도 아니고 오천 원에 팔고 있었는데 말이다. 성능을 보장할 순 없지만 오천 원어치만 써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살까 말까, 내적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는 사이, 한 아주머니의 팔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통로로 쑥 들어오며 “여기 하나 주세요”라고 나직이 외쳤다. 바로 내 근처였는데, 기회는 지금인데!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내 입은 굳게 닫혀 있고 시선은 넘어가지 않는 책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각질제거기를 한 개밖에 팔지 못한 아저씨는 다음 기회를 찾아 다음 칸으로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런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분명 집에 가서 켜보면 작동되지 않았을 거야, 그 아주머니는 속은 게 분명해 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아까운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손해 본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그곳에서 한 손을 살짝 내밀며 “저도 하나 주세요”라고 해 봤자 나를 기억하는 사람 하나 없을 텐데.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젊은 여자가 이런 짝퉁을 사네,라고 할 사람 없을 텐데. 저 여자는 각질이 얼마나 많길래, 라며 눈살 찌푸리는 사람도 없었을 텐데. 설령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한들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건 그 사람 머릿속 사정이지.

    나는 얼마나 사람들에게(그것도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걸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사보면 어때서.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사지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오천 원인데! 심지어 지갑에 오천 원이 있었는데! 오히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장소가 그렇게 의문스러운 물건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사는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르는데.
아, 좀 지겹다. 괜찮은 사람인척 하는 것도. 하기야 그런 거 산다고 괜찮은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데. 나는 몇 살을 더 먹어야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여자가 될까? 남들 눈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는 걸까. 삶이 더 윤택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어쩌면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삶이 더 화끈하지 않을까? 짝퉁 각질제거기 하나 놓쳐놓고 오만 생각이 다 드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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