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는 여자의 오늘 사는 이야기
서하 방을 청소했다. 다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책장만 정리해야지, 하고 시작했는데 뽀얗게 먼지가 쌓인 커튼도 떼고 뒤죽박죽인 장난감도 정리하고 비좁은 방에 펼쳐 놓았던 내 책상도 접었다. 어제 새벽 책을 읽다가 차일피일 아이 방 청소를 미루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을 했고 그러다가 말이 나온 김에 그냥 해버리자 했다. 오늘 아침 서하를 등원시키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휴대폰으로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틀었다. 손보미 작가가 나왔다. 청소하는 건 그닥 내키지 않지만 팟캐스트 들으며 치우는 건 가끔 좋아한다. 이건 뭐랄까. 노동이 노동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기분이랄까. 몸은 청소하고 있지만 귀로는 지식을 담고 있단 생각에 나 자신이 꽤 효율적으로 여겨진다. 나의 청소엔 무조건 뭔가 들을 것이 필요하다. 남편이 청소나 설거지할 때 음악을 듣는 쪽이라면 나는 팟캐스트 쪽이다. 당연히 책이나 글과 관련된 것만 듣는다. 때로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책이나 글 쪽으로) 내 취향이 너무 편협해 보이진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이게 좋은 걸 어떡해.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는 것도 내 스타일이지. 서하 방에 있는 블루투스 시디플레이어를 켜서 휴대폰과 연결했다. 명확한 소리가 작은 방에 골고루 퍼졌다.
몇 주 전 조카들이 어릴 때 읽던 책을 잔뜩 싸들고 왔다. 꾸러미로 3, 4개가 되는데 아이들 책이 다 그렇듯 하드커버로 돼 있어서 꽤 무거웠다. 어찌어찌 아이 방에 갖다 놓긴 했는데 영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하 방에는 새로 산 책장이 있지만 책이 꽂힌 칸도 있고 잡동사니를 쌓아 둔 칸도 있어 규칙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안 입는 겨울옷을 짱 박아 두기도 했다. 먼지가 쌓인다는 단점이 있고 볼 때마다 저걸 치워야 하는데, 라는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파진다) 아이는 신경도 안 쓰지만 아이와 놀아줄 요량으로 그 방에 들어가기라도 할 때면 균형과 정갈함이라곤 하나 없는 그 심란함에 질려 내가 먼저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 상태로 계속 두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제대로 놀아주지도 않는데 방이라도 깨끗이 치워주자. 방이 깨끗하면 나도 그 방에 더 머물고 싶겠지.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책장만 치울 생각이었다. 오래전 정리정돈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저자가 말하길 한꺼번에 집안의 지저분한 모든 곳을 치우고 싶겠지만 그러자면 쉽게 지치고 너무 힘이 든다. 그러니 하루에 선반 하나, 서랍 한 칸만 치운다 라는 생각으로 정리를 하면 시간도 5~10분 정도밖에 안 걸리고 힘도 들지 않으니 더 효율적이라고 했다. 한꺼번에 다 치우고 자유를 누리고 싶은 쪽이었던 나는 이 내용을 읽고 뒤통수를 살짝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뭐 하러 한꺼번에 다 치우려고 했을까? 어차피 긴 인생 정리정돈도 멀리 봐야지. 하루 선반 하나 싱크대 한 칸씩만 정리하자. 더 나아가서 오늘은 침실만 정리하고 다음 주말에는 욕실만 치우고 그다음 휴일에는 현관 신발장만 치우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집안 전체가 정리돼 있겠지.
오늘은 서랍 한 칸만 치우자
팟캐스트를 틀어 놓고 냉동실에서 편의점에서 사다 놓은 얼음컵을 하나 꺼내 껍질을 깠다. 거기에 같은 날 편의점에서 산 스위트 아메리카노를 부었다. 종이 빨대를 꽂고 서하 방으로 다시 직행. 큰 일을 치르려면 카페인이 필요하기에 시원한 커피를 쭈욱 들이켰다. 그런 다음 책장을 위아래로 두어 번 훑어본 후 정리를 시작했다. 일단 책장에 쑤셔 넣었던 잡동사니를 죄다 끌어내고 비워진 칸을 물티슈로 닦았다. 언니네서 가져온 동화책 꾸러미를 가위로 잘라 빈자리에 꽂기 시작했다. 제목만 봐도 바로 읽고 싶은 책들이 잔뜩이었다. 보따리로 있을 때는 알 길이 없던 제목들. 맨 위 칸에 책을 꽂으며 얼른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단 생각을 했다. 책장에 모든 책을 다 꽂았다 하나의 낙오 권도 없이 모두 꽂혔다. 자연스럽게 장난감 정리가 시작됐다. 예전에 한번 분리해뒀던 장난감들이 죄다 섞여 있었다. 나는 다시 커다란 통을 비우고 물티슈로 한번 닦아낸 다음 레고를 전부 거기에 담았다. 최근 들어 발에 밟히는 레고가 늘었다. 한 곳에 모아두면 이런 불상사가 조금은 줄 것이다. 포켓몬 카드만 모아둔 박스, 미니카만 모아놓는 박스 그리고 색연필, 크레용, 사인펜 등만 모아놓는 박스까지 정리를 마쳤더니 오후 2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4시간 넘게 정리한 것이다. 아이 방과 거실에서 떼어낸 커튼을 세탁기에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사 와서 한 번도 빨지 않았다.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 집안일들이 있다. 커튼 빨기, 소파 방석 빨기, 쿠션이나 베개 커버 빨기 등이 그렇다. 일단 남편은 세탁기 주변에 잘 가지 않는다. 빨아 놓은 옷은 잘도 입으면서. 정리정돈이 끝난 방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했다. 환기 때문에 열어 놓은 창문을 닫고 방을 휘 둘러보았다. 이보다 더 개운한 게 있을까? 말끔해진 방,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까 하다가 관둔다. 언제고 또다시 엉망진창이 될지 모르지만 제발 좀 길게 가길.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가 제 방을 보더니 내게로 달려와 엄지 손가락을 척 올린다. 엄마 잘했어!라고 하는 것 같다. 왤까?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잘했어,라고 느껴지는 건. 그러면 어떠랴 아이가 좋아하면 됐다. 청소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모습은 아이가 즐거워하는 거였으니. 깨끗하고 넓어진 방 한가운데서 아이가 레고 박스를 앞에 두고 뭔가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또 한 번 뿌듯. 이 맛에 청소하지. 그냥 내버려 두기 시작하면 언제고 폭발 직전의 모습이 되고 말 아이의 방. 가끔은 어질러진 장난감 정리는 시켜도 아직까진 직접 청소해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늘 드는 건 아니다. 때로는 난장판이 된 방을 보며 괴성을 지를 때도 있으니까)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이렇게 말끔해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뭘 뜻하는진 알 수 없다. 어림짐작으로 엄마가 나에게 관심 가져 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려나? 누군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정서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게 청소여서 조금 생뚱맞을진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