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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y 03. 2023

일상과 쓰기의 삶을 가르는 빗질

<신간> 오늘로 쓴 카피 오늘도 쓴 카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극본 작가 중 한 명인 정서경 작가는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하다. 글 쓰는 엄마로서 그의 작업 루틴을 설명하는 대목을 잡지 인터뷰에서 읽었다. 


그러다 작업실에 오면 20분 정도 워킹패드 위를 걷고 씻으면서 집안일을 지우고 대본을 쓸 수 있는 머리를 만들어요. 쓰기 이전의 삶과 쓰기의 삶 사이를 구분하기 위해 하는 빗질 같은 거예요.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와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쓰는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는 다르지 않을까요. 저는 여러 가지 비율이 잘 맞아야 균형감이 생긴다고 믿는 쪽입니다. <씨네21X한겨레21 DRAMA WRITERS> 1397호


어떤 일을 하건 예외 없이 워킹맘에게는 일과 생활의 분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지금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좀 전에는 초등학생인 아들이 이제 막 학교, 학원 마치고 집에 왔다며 확인 전화를 해주었다. 참 감격스럽다. 아이와 내가 분리된 채 각자 일상이 가능하다니! 아이가 어릴 땐 상상만 하던 생활의 변화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일명 ‘애데릴라’라 칭하며 아이의 하원 시간에 맞춰 집에 있어야만 했다. (사실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그러기 위해서 오후 2시 이전에 모든 외부 일정을 마쳤다. 강의도 하고 출판사 미팅도 있고 카피라이팅 업무로 브랜드 미팅이 있는 나로선 그 시간이 참 빠듯했다. 이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이모나 할머니에게 아이의 돌봄을 의지해야 한다. 오로지 나 편하자고 아이가 초등학교 가자마자 키즈폰을 사주었다. (물론 아이도 간절히 원했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 전화만 가능해도 살 것 같았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긴 시간 분리가 가능하겠지? 나중에는 내가 없는 게 아이도 더 편할지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일하기 위해선 ‘쓰기 이전의 삶과 쓰기의 삶’을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집 밖에 나와서 글을 쓰는 편이 효율적이다. 집에서 글을 쓰면 해야 할 집안일들이 쓰는 일과 겹쳐진다. 몇 자 쓰다가 쌓인 설거지가 생각나고 몇 자 쓰다가 세탁기에 가득한 빨랫감이 떠올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안 하면 그만이라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더라. 안 보는 게 상책! 작가들이 부러 작업실을 얻거나 아예 공감을 분리해 건너 방으로 출근한다는 개념을 스스로 강하게 심는다. 

이미지 출처_언스플래시

정서경 작가는 작업실에 가 20분 정도 워킹패드를 걸으며 ‘대본을 쓸 머리를 만든다’고 했다. 워킹패드 위를 걸으며 엄마, 아내로서의 자신을 툭툭 털어내며 타인을 생각하던 자신에서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자신으로 재정비하는 루틴일 것이다. 엄마인 채 쓰는 글과 나인 채 쓰는 글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글을 쓴다는 점에서 모두 작가라고 부르지만 본업은 각기 다른 저자들처럼, 엄마로서의 작가와 나로서의 작가 또한 직업이 다른 거나 마찬가지다. 


아무튼 정서경 작가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워킹패드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봤다. 워킹패드 혹은 러닝머신을 다이어트나 체력을 키우는 운동의 목적으로만 얘기해왔다면 이젠 이쪽의 나와 저쪽의 나를 분리하는 루틴을 완성해줄 아이템으로 말해볼 수 있다.


가볍게 걸으면서 돌아오세요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 당신으로 

(워킹패드일 경우)

/

힘차게 뛰면서 돌아오세요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하는 당신으로 

(러닝머신일 경우)


나는 지독히도 타깃을 좁히는 걸 좋아한다. 타깃을 좁혔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그 대상만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가령 홈쇼핑 등에서 워킹패드를 판다면 여러 사례를 들어줄 것이다. 그때 이렇게 첨언해주는 거다. “가볍게 걸으면서 여러분 자신으로 돌아가는 거예요”라고 말이다. 저녁 식사 후 더부룩하니까 좀 걷고 싶을 때도, 3킬로그램 정도 살을 빼고 싶을 때도, 일과 생활이 분리돼야 하는 상황이다. 이를 짚어주는 섬세함에 누군가는 귀를 기울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고, 더 많이 물건을 팔고 싶다면 다양한 군상을 언급해주자. 거기에 나만의 섬세함 한 스푼 더했을 뿐인데 ‘어? 저건 내 얘긴데?’하고 고개를 돌린 누군가와 눈 마주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 아이를 돌보는 엄마로 돌아가야겠다. 글 쓰는 나에서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보호자로 전환한다. 워킹맘의 삶의 균형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이 글은 신간 <오늘로 쓴 카피 오늘도 쓴 카피> 의 본문입니다.)

오랜만에 신간 소식 전해드려요. 

브런치에서 연재한 '소설로 카피 쓰기'로 묶인 책 <문장 수집 생활>의 개정판 <오늘로 쓴 카피 오늘도 쓴 카피>가 출간되었습니다. 기존 원고를 전부 수정하고 새 글들을 실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지금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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