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쓰지 못한 카피를 씁니다
2019년에 들어서 나의 독서 취향에 변화가 있다면 잘 읽지 않던 분야의 책을 더 많이 읽자는 거였다. 소설이나 에세이에 편중되었던 독서 카테고리를 정치, 역사, 과학, 경제 등 소설, 에세이 빼고 나머지를 골고루 읽어 보자는 취지였다. 내가 문학 외의 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완독 할 수 없음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시작도 안 했던 것인데 이런 식으로 계속 한쪽으로 치우친 독서만 해서는 모르고 지나치는 게 너무 많을 것 같았다. 쉽게 술술 잘 읽히는 책만 읽으면 발전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취미 삼아 휴식의 개념으로 간간이 책을 읽는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나는 글도 쓰고 카피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졌으니 다방면으로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재승 교수가 쓴 <열 두 발자국>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만약 DNA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면 DNA에 관한 책들은 별로 뒤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학 서적을 뒤적거리죠. 그런데 그곳에서 DNA를 설명할 수 있는 절묘한 예제나 비유를 찾게 되면, 그때부터 글이 저절로 술술 풀립니다. DNA에 관한 책들을 뒤적거린다면, 기존의 글들과 유사한 글이 나오겠지요.”
소설로 카피 쓰기를 응용했던 <문장 수집 생활>이 많은 카피라이터나 마케터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건 소설이라는 문학에서 카피를 풀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예상치 못한 책에서 내가 쓰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하는 문장을 발견하면 어찌 신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까다롭게 카테고리를 나누지 않고 흥미롭다고 생각되거나 읽어보면 좋겠다 싶은 책을 다양하게 읽기 시작했다. ‘생활 변화 관찰기’라는 부제를 단 <2019 트렌드 노트> 또한 그렇게 읽게 됐다.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내가 진작 읽어야 했음에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부제가 마음에 확 와 닿았다. 생활 변화 관찰기라니. 결과적으로 수없이 많은 밑줄과 포스트잇을 붙인 이 책을 읽고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부분이었다.
카피를 쓰는 사람이 절대 빠지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고정관념이다. 의도한 타깃에게 물건을 팔아야 하는데 그 타깃을 내 고정관념에 휩싸여 정해버리면 그것만 한 오류가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을 읽다가 정말 뒤통수 맞은 것 같았던 부분이 있는데, 1인 가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혼자 사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들을 타깃으로 한 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 사이트에서도 이벤트를 기획할 때 1인 가구용 가전, 가구, 소품 등을 어필하곤 했는데 이 상품들의 공통점은 ‘작다’는 거였다. 혼자 사는데 큰 가구와 가전이 무슨 필요 있겠어? 당연히 작고 앙증맞은 제품을 사겠지, 하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트렌드 분석에 의하면 혼자 살수록 대형 텔레비전을 선호하고 세탁기 또한 빨래를 일주일에 한 번씩 몰아서 하기 때문에 소형보단 대형을 산다는 것이다. 오히려 4인 이상의 가족이 함께 사는 집에서는 각자 방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큰 텔레비전이 필요 없다. 실제로 우리 집도 거실에서는 아이패드로 영상을 본다. 아이는 아이용 패드가 따로 있어서 그걸 틀어준다. 아기가 있는 집은 무조건 짐이 많고 복잡할 것이다 라는 판단도 오류일 수 있다.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를 낳은 후 미니멀하게 사는 가정이 늘고 있다. 즉 물건이 많을수록 아이를 제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아예 없애는 것이다. 이 부분에선 나도 적극 공감했다. 나 또한 아이 낳고 엄청나게 물건을 버렸다. 더불어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HMR(간편식) 제품의 경우 젊은 층이 많이 선호할 거라 생각했지만 50대 주부들이 가장 즐겨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혼자 사는 사람들은 한 끼라도 제대로 먹길 원하지만 밥하는 노동에 질린 주부들은 쉽고 간편하고 맛까지 좋은 반조리 식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점차 증가하는 1인 가구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한 그들의 공감을 얻기 어려우며, 다인가구의 호응도 얻지 못할 것이다. 1인 가구를 위한 상품개발은 더 이상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멋진 라이프를 빛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2019트렌드노트_김정구 외>
자, 그렇다면 카피를 쓸 때도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보자. 혼자 사는 30대 남자에게 소형 텔레비전을 추천했다면 이제는 거실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는 싱글남에겐 50인치 이상의 텔레비전을 추천해 보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부에게는 불편함을 참지 말고 이것저것 필요한 건 다 사세요, 에서 가능하면 꼭 필요한 것만 사게끔 유도해보는 건 어떨까?
1)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
스마트폰으로 드라마 다시 보기 하면서
피코크로 식사 해결할 때
(영상 속 주인공은 50대 주부)
2) 피코크, 콕찝어 이게 내 행복
혼자 먹는 식사가 외로울 거라 정의 내리지 말자. 50대 주부의 혼밥은 처량한 식사가 아니라 경험한 적 없는 혼자만의 꿀맛 같은 휴식이다. 불덩이 같은 주방에서 재료 일일이 다듬어서 끓여 먹는 국이 아니라 봉지만 쓱 뜯어서 냄비에 붓고 끓이면 다 되는, 세상 간편한 식사다. 혼자 밥 먹는 그들을 처량하게 봤던 시선을 당장 거둬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