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의 뒤편

오후 4시에 쓰는 글

by 이유미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한다. 벽에 걸린 시계는 멈췄다. 늘 그렇듯 나는 남편에게 건전지를 바꿔 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건 결혼 이후 항상 남편의 몫이었다.


“여보, 벽시계 멈췄어. 건전지 좀 갈아줘요.”


늦은 귀가를 한 남편은 밥 말은 미역국을 한 수저 뜨며 벽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응.”


귀찮은 듯한 남편의 대답. 9년간의 결혼 생활에 빗대어 볼 때 그는 밥을 먹고 나서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착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한번 말하고 이내 입을 꾹 닫아 버렸다. 남편은 요 며칠 계속 야근이다. 중국에 있는 기업을 상대로 수주를 따내려고 작업 중인데 금액이 워낙 백억 단위를 훌쩍 넘다 보니 만만치 않은가 보다. 그 수주를 받으면 회사가 일 년은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워낙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그가 일할 때는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려 내 쪽에서도 배려한다.


이틀 뒤 오후, 거실에서 네 살짜리 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돌아올 시간이 된 것 같아 무심코 시계를 봤는데
여전히 8시 30분에 멈춰있었다. 신경 쓰고 있지 않다가 아직도 남편이 시계에 건전지를 갈아 끼우지 않았음을 알고 속에서 약간의 부아가 치밀었다. 나 또한 뜻 모를 오기가 생겨 죄 없는 시계만 째려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아이들 보느라 종일 정신없는데 뉴스 볼 동안 좀 갈아 끼우지.’


그날도 남편은 밤 12시가 다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들어왔다.
딱 보기에도 기운 없어 보이는 남편이 측은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8시 비행기로 중국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거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펴고 일거리를 꺼내 놓았다.


“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침 비행기라면서.”
“이것 좀 해놔야 할 것 같아서. 김 대리가 정리해 주긴 했는데 마무리가 덜 된 거 같아.”


말려도 소용없을 거 같아 미숫가루에 얼음을 띄워 갖다 주었다.
남편은 고맙다 말하며 한 모금 마시더니 가루가 밑에 다 가라앉아 층이 나뉠 때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아이를 업어가도 모를 남자다. 혼자 잠들기가 뭣해서 소파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주기로 했다. 몇 페이지 읽다가 눈이 감겨 시간을 보려고 시계를 봤는데 멈춰있는 시간이 멋쩍었다.
앞에 있는 남편에게 다시 말할까 했지만 노트북에 코를 박고 미간에 내천 자를 그리고 있는 그를
지금은 건드릴 수 없었다. 일단 출장을 다녀온 다음에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4시간 후면 집을 나서야 한다.


깜박 졸았나 보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남편은 여전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었다.


“여보 아직 멀었어요?”
“응 거의 다해가. 들어가서 자. 거기서 그러지 말고.”


졸았던 게 부끄러워진 나는 읽던 책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며, 나갈 때 깨우라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두 번 끄덕거렸다. 아이보리색 커튼 사이로 햇살이 눈 부셔 눈이 떠졌다.
봄이 없고 여름이 온 탓에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꿉꿉하였다.
도대체 몇 시지? 해는 이미 바짝 떠올랐고 집안은 조용했다. 조금 늦게 잠들어 깊이 잔 모양이다.
새벽에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든 것 같다.
남편은 당연히 옆에 없었다.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보며 거실로 나갔다.
7시 20분. 남편은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깨우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잔 게 민망해 뒷머릴 긁적였다.
출장 가방을 미리 싸 두었더니 남편은 나를 깨우지 않고 집을 나선 모양이다.
괜히 현관에 나가 사라지고 없는 남편의 구두를 찾았다.
나는 곧 첫째 아이를 깨우기 위해 아이 방으로 가다가 째깍째깍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거실 벽을 보았다.
7시 23분.
시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새벽까지도 멈췄던 시계였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두세 시간 전까지 그가 앉아서 일하던 거실 테이블 주변을

바라보며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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