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 미식생활 세번째, 블라인드 와인 시음회
길었던 추석 연휴, 와인을 좋아하는 지인들끼리 모여 블라인드 시음회를 진행했다. 나는 블라인드로 와인을 맞출 수 있을 만큼의 와인 지식이나 남다른 미각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자리는 마다하지 않는 편인데다가 한창 와인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지라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특히나, 이번에는 와인을 사랑하다 와인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인이 저돌적으로 블라인드에 진행되는 와인 셀렉과 지원마저 아끼지 않았기에 고마운 마음과 와인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자리를 찾았다.
블라인드 시음회는 서울 삼성동의 와인샵 제이쏨에서 진행됐다. 벽면을 가득채운 와인과 큰 테이블이 인상적인 곳이었는데, 모이는 지인들마다 와인과 곁들일 간식을 지참해 더욱 풍성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나도 전날 빵을 먹겠다는 집념 하나로 다녀온 대전 성심당에서 산 빵을 들고갔다.
블라인드 시음회를 주최한 지인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엑셀로 자료까지 만들어오는 놀라운 정성과 열정을 보이며 모임을 리드했다.
블라인드 시음회라고 해서 전체가 블라인드는 아니었고, 몇 가지는 품종이나 특성도 알려주어 와인에 대해 더욱 잘 알면서 마실 수 있었다.
첫번째 와인은 보히가스 까바 브뤼 리제르바. 스페인에서 생샌된 와인으로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샴페인을 대신할 만한 선택지"라고도 언급했던 합리적인 가격대의 스파클링이다. 와인은 잘 모르는 나도 일단 '까바'하면 괜찮다는 소리가 나온다. 과일향과 작은 버블들이 오래 지속되는 와인, 저마다 지참한 빵, 치즈, 디저트와 함께 마셨다.
이 날 빵도 맛있었지만, 치즈가 참 맛있었다. 와인과 치즈는 정말 뗄레야 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사실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 번에 너무 포만감을 주는 음식을 선호하지 않아서, 치즈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두번째로는 두 가지 슈냉블랑을 블라인드로 비교해보며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 와인 맛으로 생산지나 종류를 구분할 정도의 미각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각각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맛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웠다.
슈냉블랑 한 가지는 남아공의 내추럴 와인 마더락 리퀴드 스킨(Mother Rock Liquid Skin, 2019). 포도송이를 통째로 발효하고 스킨 컨택(껍질을 침용한 것)한 와인이다. 나머지 하나는 옵스탈 칼 에버슨(Opstal Carl Everson Chenin Blanc, 2017). 마찬가지로 남아공 와인이다. 나는 내추럴와인의 터치가 좀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날도 확실히 마더락이 훨씬 센 뉘앙스였고 후자는 비교되어서 그런지 미네랄감이 더 느껴졌다. 난 좀 더 부드러운 맛을 선호하는 편이라 칼 에버슨이 더 입에 맞는다고 느꼈음.
두번째 와인이 남아공이라는 산지를 가지고 각기 다른 맛을 보여줬다면, 세번째부터는 블라인드 시음회의 재미가 본격적으로 올라왔다. 각각 화이트, 레드 와인을 따라주길래 이게 뭘까 하고 생각했는데 바로 플라뇌르 와인스의 샤도네이(Flaneur Wines Chardonnay, 2019) 피노누아(Flaneur Willamette Valley Pinot Noir, 2019) 2019년 빈티지를 가져와서 함께 내놓은 것!
플라뇌르 와인스는 미국 윌라멧 벨리에 있는 와이너리로 이름에 들어가는 '플라뇌르'는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사람과 세상을 관찰하며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와인을 생산한다는데, 새 프렌치 오크통으로 숙성하고 천연 효모로 발효해 역동적인 풍미를 가졌다고 한다.
레드보다는 화이트의 약간 가벼운듯 복잡미묘한 맛을 좋아하는데, 플라뇌르도 샤도네이 쪽이 좀 더 입에 맞았다.
네번째 블라인드는 그야말로 생각도 못했던 방식, 두 가지 레드를 따라주고 맛을 비교해보게 해서 다들 어떤 와인일 것이다, 어디에서 생산했을 것이다를 말하고 있었는데 사실 같은 와인의 다른 빈티지였다! 가져온 와인은 이태리의 마르케시 프레스코발디 카스텔지오콘도(Frescobaldi, Castelgiocondo Brunello di Montalcino)로, 각각 2017년, 2018년 빈티지임이 밝혀졌다. 두개가 완전히 다른 것일거라고 말하고 있던 와중이라 빈티지만 다른 같은 와인이라는 점에 다들 놀라고 전혀 다른 맛에 너무나 신기했다.
년도와 계절 변화에 따라 같은 와인의 맛이 이렇게 달라지는 구나를 몸소 경험했다. 맛은, 시간이 좀 지난지라 흐릿하지만 2017년도가 입에 잘 맞았던 듯.
마지막 와인은 프랑스의 도멘 샤를 오두왕 막사네 로제(Domaine Charles Audoin Marsannay Rose, 2021). 사랑스러운 빛깔의 로제 와인으로, 피노누아로 만든 로제 와인 중 유일하게 AOC 등급을 받았다. 평소보다 다양한 와인을 신경 쓰고 마셔서인지 이미 입이 많이 지쳐서 맛을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자몽이 생각나는 향과 맛이었던 것 같음.
일행 중에 한 분이 깜짝 도네이션을 해주셔서 한층 입이 즐거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시음 후에는 인근에서 피자와 족발을 시켜 배불리 먹고 마시는 시간도 가졌다.
이렇게 복기해보니, 확실히 와인은 맛을 잊어버리기 전에 빠르게 뭔가를 쓰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주에도 이 멤버들과 와인 모임이 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리스트가 구성될지 너무나 기대된다.
※.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arundia )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