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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May 01. 2020

비읍의 날들



아침에 일어나   가구 위치를 바꾸었다. 침대는 베란다 쪽으로, 책상은  쪽으로, 책장은 벽시계 밑으로, 낮은 의자는 침대맡으로, 전축은  자리 그대로. 나는 나의 방이 좋다. 종일 볕이 깊이 들어오고, 따뜻한 조명이  개인 데다 귤피 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들이 곳곳에 놓여 있고 읽은 책과 읽지 않은 , 읽다가  책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주황으로 가득한   안에서 무언가 쓰는 일이 좋고, 눕는 일이 좋고 서성이는 일이 좋다. 오늘은  안에 잠겨 한껏 즐거웠다.


봄은 봄,하고 발음할 때 가장 봄 같다. 봄은 지면서 찾아와 끝내 이기면서 떠나간다. 나는 겨울에게 지면서 다가오는 봄이 가장 반갑다. 그 뒤로는 고군분투하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일이 버겁다. 다 솎아낸 나무에 달린 아슬아슬한 이파리, 터질 듯한 꽃봉오리, 어디서든 자라나는 잡초들, 이름 모를 풀들, 자꾸만 파래지는 숲과 산, 볕을 이기려는 바람까지. 새로움의 온상인 봄을 경외하듯 바라보지만 내겐 봄이 늘 어색하다. 나는 지는 것이 더 좋다. 지는 해, 지는 꽃, 가을과 멀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봄은 다름 아닌 볕으로 온다. 쏟아지는 볕이 아니라 수북이 쌓이는 볕으로 온다. 봄이 슬픈 이유는 볕에 있다. 볕은 사라짐을 반복하고 봄에게 기다림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볕이 없는 봄은 겨울과 다름없다. 봄볕은 너무 맑아서 더럽힐 수 없는 물 같다. 봄볕의 깊이는 야트막하여 첨벙첨벙 뛰어다닐 수 있다. 봄볕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일종의 축복이다. 오늘은 볕 속에서 잠깐, 고운 사람을 기다렸다. 고운 사람은 내게 볕과 같이 환한 책을 한 권 선물해주었다. 고운 사람은 너무 고와서 나를 자꾸 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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