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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May 14. 2020

영원하고 영원한 나의 친구




내겐 스스럼없이 친구가 된 좋은 스승이 몇 있다. 그들은 처음엔 내가 우러러보는 사람이었다가, 내 곁으로 내려온 사람이었다가 내 손을 잡아준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난 그들이 누군가 보낸 천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녀원 소속의 가톨릭 고등학교를 다녔다. 교장을 포함한 몇몇 선생님들이 벨륨을 쓰고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이었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교였고, 나는 그 분위기가 다행스러우면서도 자주 위축됐다. 존재감 없는 학생으로 변해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효주 아녜스 수녀님은 그때 내게 다가온 천사 중 하나였다. 수녀님은 오로지 공부와 또래 친구로 가득 찬 나의 세계에 다양한 색깔을 불어넣어주었다. 일 년 동안 수녀님께 배운 것은 나를 들여다보는 일.


나는 친구들보다 수녀님과 가까워졌던 세월을 참 좋아했다. 3학년 때, 피폐해진 정신으로 복도에서 수녀님을 마주치면 수녀님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이따가 저녁 먹고 수녀님 방으로 와." 학교 안에는 수녀님이 담당하던 작은 방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종교 행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만들거나 선배들이 물려주는 교복과 체육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작은 방에 들어가면 수녀님이 주전자에 물을 끓여놓고 나를 기다렸다.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도 나누었다. 수녀님이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을 때, 나는 혜화에 있는 신학교 교정에 자주 놀러 갔다. 학교 깊숙이 들어가면 낙산을 따라 커다란 비밀의 숲이 나오는데, 그곳을 소개해준 사람도 효주 아녜스 수녀님이다. 지금까지 수녀님과 나는 멀리 있어도 가까운 마음으로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수녀님은 주로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나는 적지 않은 여정으로 수녀님을 찾아간다. 수녀님에게 가는 길을 나는 오래도록 닦아 놓았다.


C 선생님은 내가 오래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는 수학을 가르치면서 소설을 짓는 이상하고 멋진 선생님이었다. 수학 선생님인 그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는 내게 그 말을 아껴둔 고백처럼 했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래 알던 사람처럼 친했는데,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신기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시고, 터덜터덜 집에 가는 날이면 꼭 집 앞까지 같이 걸어주며 시시콜콜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내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입과 귀가 공평한 사람이라, 말하는 만큼 잘 들어주었다. 우리는 종종 뜬금없는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는데, 어느 봄날, 쨍한 오후에 도착한 운동장 벤치에서 죽음에 대해 덤덤히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한 번 나를 그의 집으로 초대했는데, 아주 정갈한 상이 차려져 있었고 나는 그때 귀함이 무엇인지 몸소 깨달았다.


그는 마음과 행동이 가까이 있어 하고 싶은 일을 쉽게 쉽게 잘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사랑도 쉬운 일인 것 같았는데, 그가 가진 사랑이 가볍기 때문이 아니라 많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아주 멀어졌던 그가 다시 돌아와 나를 만나고 떠났다. 추운 날 아무도 없는 작은 동산을 함께 걸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생각과 우리의 그토록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헤어질 무렵 그는 오랫동안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영원하고 또 영원한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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