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신데렐라

지하철에서_연작소설

by 정유미

어젯밤에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었다. 영란은 본방사수를 하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으면 완결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한창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의 완결을. 문제는 전화 통화였다. 민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그간 참아온 기다림이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민지는 중학교 동창이다. 절친하다고는 못 하지만 이상하게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사이로 벌써 15년을 지냈다. 영란이 먼저 연락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민지에게서 아주 갑작스럽게 전화가 걸려 왔고 그러면 며칠 이내에 둘은 만나게 되고 그러고 나면 한 일 년 정도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산다. 영란은 자신이 민지를 정말 친구로 여기고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만약 민지가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영란은 굳이 민지에게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퇴근 후 막 집에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려던 참이었다. 하루 중 영란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김민지. 순간 받지 말까, 생각했지만 영란은 전화를 받았다. 지금 받지 않는다 해도 결과는 똑같다. 민지는 영란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계속할 테니까.


“너 소개팅 안 할래?”

“... 뭐?”

인사도 전조도 없이 민지는 그렇게 말했다. 영란은 불의의 기습을 받은 기분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영란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얘 또 이러네.


“안 할래? 진짜 괜찮은 남자야. 야, 동갑인데 사장이야. 스타트업이라 조금 그렇긴 하지만 뭐 그런 거 따질 때니? 고만고만한 월급쟁이보다야 훨씬 낫겠지. 오히려 작은 사업체가 나을 수도 있어. 나는 우리 남편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쓸 거 많아서 죽겠다, 죽겠어. 사장 사모도 그냥 하는 일은 아니더라.”


한참 자랑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을 쏟아내는 민지의 말을 영란은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막 거절의 말을 하려고 입을 떼려던 찰나 민지가 말을 가로챘다.


“너도 결혼해야지. 아니면 연애라도 하든가. 너 정말 눈 너무 높은 거 아니니? 저번에 소개해준 남자도 그렇고 적당히 해. 그러다 더 나이 먹으면 너 진짜 후회한다. 우리 서른 넘었잖아. 언제 서른 오냐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서른 오고, 넘었잖아. 이러다 마흔도 훅 온다고. 언제 마흔 오겠어, 하다가 훅. 무슨 말인지 알지? 응? 할 거지?”

“아니,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누구 만나고 싶은 생각 없어. 저번에도 말했......”

“나한테 부담 가질 거 없어. 잘 안 돼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만나봐. 내가 네 전화번호 줬거든? 오늘내일 중으로 연락 갈 거야. 회사도 너랑 가까운 데 다니더라. 진짜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만나봐. 정말 괜찮다니까. 그 왜 있잖아. 요즘 하는 드라마. 그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랑 성격이 엄청 비슷해. 너 드라마 좋아하니까 그거 보지? 분위기도 비슷하고 진짜 딱이야.”

“아니, 나는.”

“어, 우리 남편 왔다! 끊을게! 그럼 잘해봐. 다음 주 내로 한번 보자. 다시 전화할게!”


전화가 끊어졌다. 영란은 잠시 끊어진 전화를 붙든 채 멍하니 있었다. 3년 만에 또 당했다. 저번에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영란은 불쑥 화가 났다. 다시 민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카카오톡 메시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정민재입니다. 민지 씨한테 연락처 받아서 연락드립니다^^]


카카오톡 창에는 맨 위에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표시가 떠있었다. 영란은 ‘차단하기’를 누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그래, 이 사람이 무슨 죄냐, 민지 그년이 문제지. 내 다시 전화를 받나 봐라. 영란은 남자의 공손한 메시지에 역시 공손하게 답을 했다. 그리고 궁금증에 드라마를 보고 말았다. 어찌 됐든 자신과 만나게 될 그 남자의 성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을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보기 위해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매력적이었다.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주도적인 면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타입도 아니었다. 정말 이런 사람이 현실에 있다고? 영란은 혀를 차면서도 드라마를 끄지 않았다. 그렇게 밤새 그간 방송된 드라마를 모두 보고 말았다. 완결을 4회 남겨두고.


그래서 너무나도 피곤했다. 영란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잠이 들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어떻게 회사에서 일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 실수한 건 없겠지? 불쑥 걱정이 찾아들었지만 뭘 어쩔 수도 없었다. 전철로 30분이면 이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장 침대에 쓰러져 눈을 붙이고 싶었다. 의식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전철을 초점 없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영란의 앞뒤 옆으로 퇴근길 직장인들이 빼곡했다. 다들 비슷한 표정. 영란은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전철이 멈추고 스크린 도어와 함께 전철의 문이 열렸다. 이미 꽉 들어찬 전철 안으로 또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간다.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그 안에 또 사람이 차곡차곡 들어가게 된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었다. 영란은 떠밀리는 몸에 힘을 주며 전철을 타려고 발을 뗐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구두가 발밑의 승강장 틈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놀라서 발을 빼자 구두가 뒤꿈치부터 휙 벗겨졌다. 어엇, 안 돼 라고 말을 내뱉으려는데 승강장 틈에 끼어있던 구두가 옆 사람의 발에 차여 속절없이 시커먼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영란은 한쪽만 구두를 신은 채 맨발이 된 발을 허공에 두고 정지하고 말았다. 그 순간 주위도 고요해졌다. 영란을 사이에 두고 그 많은 사람들이 정지된 시간 속에 있었다. 하지만 중심을 잃은 영란이 휘청하면서 맨발을 바닥에 대자 쨍, 하고 침묵이 깨졌다. 사람들은 영란을 피해 전철을 탔다. 전철 안은 테트리스를 잘못해서 당장이라도 게임오버를 외칠 것 같은 상태였다. 전철의 문이 닫히면서 영란의 머리 위로 게임오버, 라는 문구가 떠있는 착각이 들었다.


기가 막혔다. 승강장에서 구두를 선로에 떨어뜨리다니.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앞으로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만 주의 깊게 행동하면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 주의가 피곤함 때문에 부족했던 걸까. 영란은 잠시 망연히 서있다가 맨발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정신을 차렸다. 일단 지하철 역무원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다시 고민했다. 맨발을 든 채 깽깽이를 뛰어서 역무실로 갈 것인가. 그냥 어차피 버린 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걸음으로 걸어서 역무실로 갈 것인가. 영란은 맨발에 힘을 주었다. 깽깽이를 뛰어서 간다니 생각만 해도 창피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말인가. 확실히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역무실에 가서도 영란은 한참이나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선로에 물건을 떨어뜨린 경우 역무원에게 말해도 당장은 주워다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철 운영시간에는 역무원도 선로에는 나갈 수 없도록 정해져 있다고. 영란이 그럼 제 구두는요? 하고 아연해 묻자 역무실에 있는 세 명의 역무원들도 각자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둘, 여자가 하나였다. 운영시간이 끝나면 그때 주워다 보관할 테니 나중에 찾아가시라는 한 남자의 말에 영란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장의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서.


그때 정민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낮에 카카오톡을 했을 때 퇴근 시간에 전화를 해도 되겠냐고 물었었는데 그게 지금인 모양이다. 사실은 오늘 저녁에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영란이 거절했다. 가급적 만나지 않은 채로 이 소개팅을 거절하고 싶었다. 민지의 입장이 곤란해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정민재에게는 죄가 없으니 가급적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 관계를 무마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영란은 역무원이 내준 의자에 앉아 맨발을 구두를 신고 있는 발등 위에 올려놓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정민재입니다. 퇴근 잘 하고 계신가요?”

“아...... 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영란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곤란함을 느낀 정민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란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칠칠맞은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뭐 상관없어. 오히려 잘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알아서 연락을 안 하면 그것대로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구두를 선로에 떨어뜨렸어요.”

“네?”


정민재는 선뜻 영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승강장 틈으로 구두를 빠뜨렸다는 설명에 “아, 그렇군요”라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 영란은 ‘그래서 저는 지금 한가하게 통화를 할 상황이 아니어서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역시 정민재가 말을 가로챘다. 영란은 순간 자신의 말을 하는 타이밍이 무언가 잘못된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세요? 제가 가도 될까요?”

“네? 오신다고요? 오셔서 뭘......”

“발 사이즈가 몇이시죠? 제가 신발을 사서 가겠습니다. 전 지금 구로디지털단지역인데요.”

“아, 저는 신도림...”

“금방이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이즈는요?”

“아뇨, 저 그러실 필요...”

“230이나 35 신으시나요?”

“아, 네. 30 신는데. 아니, 저 그게 아니고...”

“네. 금방 가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영란은 얼떨떨했다. 정민재의 기세에 밀려 대답을 하긴 했지만 한편 정말 오려고? 하는 의심도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몰골을 생각하면 정민재가 신발을 사들고 오고 있다는 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일어나다니.


정민재는 정말 빨리 도착했다. 20분이 채 안 돼서 영란의 앞에 나타났다. 가쁜 호흡으로 한 켤레의 아담한 구두를 들고서. 영란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를 맞아야 했다. 누가 봐도 친분은 없는 남녀의 어색한 첫 만남처럼 보였을 것이다. 역무실도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쩐지 역무원들의 표정이 흥미진진해 보이는 건 영란의 착각이겠지?


정민재는 검은 비닐봉지를 열어 한 켤레의 로퍼를 꺼냈다.


“불편하실까 봐 낮은 걸로 골랐습니다. 지하철역 안에 있는 구두 가게에서 산 거라... 좋은 신발은 아니지만 일단 집에 가실 때까지는 신으실 만할 겁니다.”


첫 만남에 느닷없이 백화점에서 사 온 신발을 내밀었다면 그거야말로 곤란하다. 무엇보다 로퍼라니, 실용성에 가치를 둔 선택이었다. 예쁘기만 한 높은 구두나 회사원의 차림과 거리가 있는 운동화 같은 것이었다면 고마우면서도 슬쩍 눈을 흘기고 싶었을지 모른다. 정민재의 센스가 나쁘지 않다고 영란은 생각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신발값은.”

“아뇨. 나중에 커피 한 잔 사주세요. 잘 맞나요?”

“네. 맞네요.”


영란은 어쩐지 온몸의 살갗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정민재가 한 말을 곱씹으면서. 나중에 커피 사란 말은 애프터인가? 이런 황당한 꼴로 만났는데도? 아니면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인가? 어느 쪽이지?


아무런 장식 없는 평범한 로퍼는 영란의 발에 딱 맞았다. 확실히 싼 재질로 만든 구두라 그런지 딱딱한 감은 없지 않았지만 맨발로 집에 갈 뻔한 것에 비하면 호사나 다름없었다. 역무원들의 시선이 신발을 신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란과 정민재에게 모였다. 안도하면서 한편 흥미로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제복을 입고 있는 역무원 중 영란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분실물은 찾아두겠습니다. 바로 찾아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시간 나실 때 다시 들러주시면 돌려드리겠습니다.”


여자의 단정한 말에 영란은 아까와는 달리 가볍게 알겠노라, 대답했다. 그렇게 정민재와 함께 나란히 역무원실을 나왔다. 정민재의 호의가 본래 사람됨이 곤란한 사람을 두고 보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소개해준 민지를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카카오톡 프로필을 통해 영란의 얼굴을 확인하고 드물게 이상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불쑥 민지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의 정민재가 아니었다면 그저 미운 얼굴이었을 텐데. 영란은 옅게 웃었다. 뭐가 됐든 당분간 드라마 볼 생각은 안 날지도 모르겠다.



“이 주임님. 저런 경우 보셨어요?”

“어떤 경우요? 승강장에서 구두 떨어뜨린 거? 아니면 남자가 신발 사 와서 데리고 가는 거?”

“둘 다요.”


이 주임은 말갛게 호기심 어린 사회복무요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제 이곳에서 근무한 지 보름이 막 지난 신참이었다. 이 주임이 지금까지 본 사회복무요원 중 그나마 가장 성실하다. 조금 호기심이 지나친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뺀질거리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둘 다 많아요.”

“많아요? 진짜? 저 이번 달에 선로에 구두 빠뜨린 사람 처음 보는데요?”

“조금 더 있어보면 알 거예요. 그나마 구두면 낫죠. 핸드폰이나 에어팟이라도 빠뜨리면 난리 나요. 저렇게 순순히 누가 신발 사다 준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일이 아닌 거죠.”

“그럼 어떻게 해요?”


이 주임은 순간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하냐고?


“뭘 어떻게 해요. 죄송하다고 빌고 달래고 그러다 지쳐 돌아가면 다행인 거죠.”

“와, 정말요?”

“네, 정말이죠. 현우 씨가 고생 좀 해요.”

“엑? 그거 제가 해야 돼요?!!”

“네. 그럼 누가 해요. 우리 다 바쁜데.”


현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졌다. 항상 말갛기만 하던 표정이 저렇게도 어두워질 수 있구나. 이 주임은 웃음을 머금고 방금 돌아간 한 쌍의 남녀를 생각했다. 이 주임에게는 정말 흔한 일이다.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흔한 일. 흔하면서 조금 성가시거나 곤란하거나 귀찮은 일. 하지만 방금 돌아간 그 남녀에게는 아니겠지. 다시없을 특별한 일로 기억되겠지. 두 사람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의 기억이 어떻게 남을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주임은 그래도 오래간만에 설레는 장면을 눈앞에서 봐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오늘의 야간 근무는 조금 할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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