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당신의 착각

지하철에서_연작소설

by 정유미

영규는 며느리의 배웅을 받으며 마음이 불편했다. 며느리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아버님. 부탁드려요. 꼭, 꼭 부탁 좀 해주세요.”


순하고 예의 바른 며느리다. 몇 해 전, 마누라가 죽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도 싫은 티, 힘든 티 한 번을 내지 않았다. 가끔 어디서 이렇게 참을성 많은 아이가 아들인 진규를 만났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아들이지만 진규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성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매사 성미가 급하고 남의 말을 제대로 안 듣는 데다 말이 경솔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반대인 며느리를 만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며느리의 속내는 어떨지 궁금했다.


아들의 부탁이었다면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며느리의 부탁은 달랐다. 생전 부탁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간곡하게 자신을 붙잡고 청원한 것이다. 외면하자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렇지. 그놈한테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 날이 오다니. 영규는 며느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집을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천천히 걸었다. 집에서 십 분 정도 도로를 끼고 걸으면 지하철역 입구가 보인다. 정년퇴직하고 퇴직금으로 3층짜리 상가 건물을 산 게 22년 전이다. 노후를 위해서였다. 영규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대부분의 퇴직자는 노후를 그런 식으로 대비했다. 건물로, 땅으로. IMF가 오기 직전이었다. 그 여파로 영규가 다니던 회사도 도산하고 말았는데 퇴직금을 받은 건 그 직전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뒷덜미의 잔털이 일어서는 기분을 느낀다. 퇴직금 받는 시기가 조금만 늦어졌다면.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면 그 끝에 원형의 넓은 광장이 나온다. 승강장으로 통하는 길을 제외하면 벽마다 커다란 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제각각 몸을 흔들어대며 춤을 춘다. 처음 영규는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훤한 대낮에 남들이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음악을 틀어놓고 흔들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세상이 변하긴 했구나, 싶었지만 혀를 차지는 않았다. 지금 그 아이들의 세대는 자신과 너무 멀기 때문이다. 혀를 차며 탓하거나 나무라기에도 거리가 너무 멀다. 영규는 간혹 그 아이들이 외계인이라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울지 모른다고 여겼다.


쿵작거리는 음악과 그에 맞춰 덩실거리는 아이들을 지나치고 승강장으로 통하는 넓은 길로 들어서면 그 길의 한쪽에 넓게 그물망을 쳐 놓은 직사각형의 공간이 나온다. 앞에는 <고객행복공간 열린 탁구장>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시민들이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탁구장이다. 그물망 안쪽에는 탁구대 3개가 일렬로 놓여 있다. 그중 맨 안쪽에 있는 탁구대에 그가 있었다. 유희순. 6살이나 어린놈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유희순이. 그런 유희순에게 영규는 오늘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28살짜리 취업준비생인 손녀의 일자리를 부탁하는 그런 아쉬운 소리를.


며칠 전 며느리가 지갑을 두고 나온 영규를 위해 탁구장에 온 적이 있었다. 마침 영규가 화장실에 간 사이 며느리가 왔다 갔는데 그 사이 희순을 만난 모양이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버님, 함께 탁구 치시는 친구분 자녀분이 사업체를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 우리 재연이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씀 좀 해주세요. 괜찮으시죠?”라는 말을 꺼냈을 땐 적잖이 놀랐다. 함께 탁구를 하고, 사업체가 있는 자녀를 가진 이라. 딱 떠오르는 이는 희순이었다. 그의 어떤 점이 며느리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며느리한테까지 제 자랑을 늘어지게 했단 말인가.


희순과는 동문이었다. 같은 상고를 나왔지만 나이 차가 있어서 함께 학교에 다니진 않았다. 그런데도 영규와 희순이 만날 수 있었던 건 동문산악회 때문이었다. 그 후에는 사는 동네가 비슷해서 만남을 지속했다. 최근에는 이곳 지하철역 안에 있는 탁구장에서 주로 만난다. 영규는 주로 심판을 맡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탁구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무릎이 안 좋아서 무리다. 나이에 비해 무척 정정한 편이지만 그래도 80이 넘은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무리라는 것을. 그런데도 노인정 같은 곳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서 며느리에게 삼시 세끼 밥 수발을 받으며 삼식이라는 뒷말을 듣는 것도 사양이다. 영규는 공짜인 데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적인 취미를 공유한다는 게 좋아서 이 탁구장에 나오곤 했다.


희순은 제가 말하길 골프를 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런 무료 탁구장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다. 순례 때문에. 70이 넘은 주제에 이제 막 60에 들어선 순례에게 치근덕대는 꼴을 보자니 기가 막힌다. 그래서 일부러 종종 훼방을 놓기도 했다. 순례는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영규를 잘 따랐으니까. 조금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뽀얀 얼굴 위로 부드럽게 주름진 얼굴이 눈이 시도록 예뻐 보이기도 했다. 먼저 간 마누라한테 미안해서 그런 마음을 얼른 눌러 담아 치워 버렸다. 그래도 희순이가 치근덕대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어서 모른 척 훼방을 놓곤 했는데 오늘은 반대다. 영규는 처음으로 순례를 미끼로 희순을 불러냈다.


탁구는 안 치고 탁구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너스레를 떨고 있는 희순이 보였다. 그 옆에는 순례가 단정하게 앉아서 성실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저렇게 열심히 들어줄 필요가 없는 말이 분명한데. 영규는 혀를 차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잠자코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며느리의 당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유, 형님! 날도 추운데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희순이 영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영규는 첫마디부터 기분이 상했다. 집에서 겨우 십 분 거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항상 저런 식으로 말한다. 오느라 고생했다고, 지금 자기가 좀 더 젊다고 유세 떠는 건가. 영규는 괜스레 느껴지는 자격지심에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애써 생각을 지우며 손을 내저었다.


“이 정도가 고생이면 방구석에나 있어야지. 희순이 자네가 오느라 고생하지 않았어? 길은 안 막히던가?”

“삼십 분 거린데, 뭐 막혀봤자죠. 오늘은 그냥 전철 탔어요. 형님이 술 한잔 사신다고 해서.”

“왜, 차 가져오지. 대리 부르면 되는데.”

“전에도 말했지만, 아들놈이 싫어해요. 지가 데리러 온다고 합디다. 늙은이가 대리 불러서 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냐고. 아무튼 제 아비를 걱정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헷갈린다니까요.”

“효자지. 희순이 아들이 효자지.”


효자라서 어찌나 다행인지. 제 아비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게 분명하니까. 지금 영규에게도 그 아들이 동아줄 같은 존재다. 중소기업 치고는 규모가 큰 사업체를 운영 중인 희순의 아들에게 자리를 하나 만들어 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해야 했다. 번번이 취업 면접에서 떨어져 자신감을 잃고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한 달 넘게 나오지 않는 손녀를 위해서. 딱한 것. 며느리를 닮아 착하고 순한 것이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해 병이 난 게 분명했다. 방에 틀어박히기 전에는 지하철에서 마실 것을 쏟아 그걸 다 치우고 내리기도 했단다. 착한 것과 맹한 것은 한 끗 차이라고 하지만 영규는 손녀가 정직하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희순이에게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 것도 아들이 데리러 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순례와 오붓한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얄팍한 미끼였는데 그래도 희순은 덥석 물었다. 확실히 이놈은 얄팍하다. 그런데도 자식 복은 있어서 늘그막에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순례한테까지 눈독을 들이니 못마땅할 수밖에. 그런데도 오늘은 놈의 그런 욕심을 이용해야 했다. 영규는 나 역시 얄팍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 그 기분에 잠식당하기 전에 얼른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영규와 희순의 인사치레를 가만히 듣고 있던 순례가 영규와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 웃는 얼굴에 영규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어이구, 주책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순례에게 웃어주던 영규를 희순이 툭, 어깨로 쳤다. 정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다.


“형님, 오늘 한 판 하실래요? 지는 사람이 술 사기로 합시다. 어때요?”


영규는 쓱 희순과 닿은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허, 웃었다.


“아니, 왜. 내가 산다니까.”

“재밌잖수. 순례 씨가 심판 좀 봐요. 잘 봐요! 동향이라고 영규 형님 더 잘 봐주지 말고!”

“심판 세워 놓고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지나 마세요.”


순례가 조곤하게 뼈 때리는 말을 하며 빙긋 웃는다. 영규와 희순은 허허, 웃으며 각자의 탁구채를 잡았다. 가끔 순례를 보면 얌전히 집에서 살림만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남매를 키웠다고 들었다. 그 남매는 교육업에 힘쓰고 있다고. 그 외에는 좀처럼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입고 다니는 옷이나 신발, 장신구가 값비싸 보이진 않지만 단정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살만하구나, 추측할 뿐이었다. 딸에게서 전화가 자주 오는데 그럴 때면 진지한 얼굴로 자리를 옮겨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다. 영규는 순례의 그런 소소한 행동이 좋았다. 적당히 비밀스럽고 예의 바르고 우아하다. 그런 순례가 희순이의 옆에 선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비합리적인 일인 것 같이 느껴진다. 순례 같은 여자는 천박함을 대범함이라 생각하는 희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세 사람은 탁구 한판을 끝내고 순례의 의견을 반영해 전과 막걸리를 파는 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순례가 막걸리를 좋아한다는 걸 영규와 희순은 처음 알았다. 술은 전혀 마시지 않을 사람 같은데 그것도 막걸리를 좋아하다니. 이런 걸 요즘 애들은 양파 같다고 하던가. 까면 깔수록 다른 면모가 나오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아니, 이것도 좀 지난 말이던가. 요즘 애들은 말이 너무 빨리 변해서 곤란하다.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많다.


술자리를 마련하고 조금 얘기를 나누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희순과 약속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영규는 빨리 자리를 뜰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되었다. 어떻게든 희순에게 한 마디 부탁을 얹고 확답을 받은 후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었다. 희순이 답을 주지 않으면 자리를 비키지 않을 각오도 되어 있었다. 없어 보이는 방법이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문제라면 그래도 가급적 순례가 듣지 않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있는 영규의 자존심이었다. 희순에게 손녀의 일자리를 부탁하는 비루한 모습을 순례에게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 순간을 보이면 순례가 자신을 어떻게 여길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80이 넘었어도 여자한테 약하거나 능력 없는 남자로 보이는 것은 싫었다. 영규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이 그런 허세를 부릴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썩 싫지 않았다. 아직은 그래도 남자인 것이다.


한참 신변잡기식 이야기를 나누며 막걸리가 세 순배쯤 돌았을 때 희순은 슬슬 영규에게 눈치를 주었다. 영규는 그걸 모른 척하며 전을 야금야금 입에 넣었다. 그러다 순례의 핸드폰이 울렸다. 평소처럼 딸인 모양이었다. 순례는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영규는 기회다 싶어 덥석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희순의 손을 잡았다. 희순의 좁쌀 같은 눈이 쌀알만큼 커졌다.


“희순아! 우리 손녀 좀 살려주라!”

“...... 혀, 형님. 왜 이러십니까?”


영규는 손녀의 상황을 설명하며 희순의 아들이 꾸리고 있는 회사에서 자리 하나만 만들어줄 수 없느냐고 사정했다. 어리둥절했던 희순의 표정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리고 곧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엔 오히려 ‘형님...’하고 작은 소리로 영규를 부르며 되레 사정하는 얼굴이 되었다. 영규의 말이 끝나자 희순이 영규에게 잡힌 손 위에 자기 손을 다시 얹으며 말했다.


“형님... 사정이 정말 딱하신 건 알겠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희순의 시선이 슬쩍 주변을 훑었다. 순례가 돌아오지는 않나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래, 안 되는 일이겠지? 요즘 누가 이런 부탁을 하나. 함부로 사람을 그렇게 쓰면 그것도 문제가 되는 모양이던데. 내가 하도 마음이 급해 이런 부탁을 했네.”

“아뇨, 형님. 제가 들어드릴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드렸을 거요. 제 아들놈이 제 말을 듣기나 하면 말입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희순은 영규의 손을 붙들고 있던 손을 거두고 막걸리를 잔에 가득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속에 이는 불을 그것으로 꺼뜨려야겠다는 듯 급하게.


“그게, 제가 원래 아들놈 회사 주식을 좀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아니면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난리를 치길래 그걸 아들놈한테 증여했어요. 그랬더니 그놈이 아주 남보다도 못하게 굴지 뭡니까. 원래도 그 주식 때문에 아비 대접이나마 받고 있었는데 저는 이제 뒷방 늙은이가 다 됐습니다. 지금은 골프도 못 치고 차도 팔아서 손주 놈 거 가끔 훔쳐 탑니다. 이따 데리러 온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저 택시 타고 집에 갑니다, 형님. 형님 취하고 나면 대충 둘러대려고 했습니다. 어쩝니까. 이래서 재산은 눈 감고 나서 주는가 봅니다. 애들 말로, 아주 망했어요.”


영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어 놀라고 말았다. 희순의 사정이 그랬다니,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항상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은 살짝 돌려 말하는 자랑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다. 자랑질이 아니라 그냥 거짓말이었다니!! 무엇보다 그게 사실이라면 애초에 부탁할 상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집에서 기다리며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며느리가 떠올랐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니, 부탁할 곳이 희순이뿐인가.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리고 아직 손녀는 젊다. 젊은 녀석이 어디 일할 데가 그렇게 없을까. 사실 영규는 다 큰 손녀가, 그것도 배울 만큼 배운 손녀가 취업이 안 된다며 상심하는 걸 이해하는 데도 오래 걸렸다.


최근 정년이 늘어나면서 기업들은 공채나 신입 일자리를 줄였다고 들었다. 나이 든 사람들을 더 일하게 하려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일할 곳이 줄어든 것이다. 영규처럼 퇴직금을 받고 그걸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게다가 국민연금을 받는 시기도 애매하다. 퇴직하고 바로 연금을 받을 수가 없다. 퇴직과 연금 지급 사이의 틈을 버텨낼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이다. 어찌 됐든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나지 않으니 젊은이들은 갈 데가 없다. 영규의 손녀도 그중 하나다. 영규가 젊은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늙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영규가 한창 일할 때는 일자리가 넘쳤다. 사돈의 팔촌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 사돈의 팔촌의 친구의 친구까지 그냥 가서 일해도 상관이 없었다. 어디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면 일거리가 있었다. 사실 IMF로 나라가 어려웠다고 하나 그마저도 영규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퇴직금으로 산 건물의 월세로 살고 있었으니까. 당시 영규의 아들과 딸들은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잘 견뎠다.


그런데 손녀는, 서른이 다 되어가는 손녀는, 그 많은 돈을 들여 대학까지 보내 놓은 손녀는, 지금 일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손녀를 써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을 것 같다며 불안을 토로하는 그 아이에게 영규는 대뜸 약한 소리 하지 말라며 소리를 쳤다. 손녀는 점점 말수가 줄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더니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사실 영규는 그런 손녀에게 당장 일자리를 안겨준다고 한들 그것이 최선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이를 끌어낼 방법은 취업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건 며느리였다. 그래서 며느리는 영규에게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고 영규는 며느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지금 이 자리에 희순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둘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은 식었고 막걸리는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희순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아 후련함 반 후회 반인 것 같았다. 후련한 쪽이 조금 더 큰 것 같지만 지만 후련하면 단가. 영규는 집에 들어가면 봐야 할 며느리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된 거 아주 늦게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적막한 테이블로 순례가 돌아왔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훅 영규와 희순 사이로 들어왔다. 꽤 통화가 길었던 모양이다. 순례가 자리에 앉으며 막걸리를 들이켜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래 자리 비워서 미안해요. 그런데 저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두 분 얘기 더 나누세요.”


순례의 말에 영규는 불쑥 화가 났다. 알고 있다. 제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아 토라진 마음이 엉뚱한 데로 향한다는 것을. 그렇게 안 봤는데 제멋대로네 로 생각이 튀었다. 어디 오라비 둘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뜬단 말인가.


“어딜 먼저 간다는 소리가 나와?”


영규의 퉁명스러운 말에 희순이 놀란 얼굴을 했다. 순례에게는 항상 유순한 형님이 아니었던가. 원래 꼬장꼬장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영감탱이가 순례에게만은 입안의 혀처럼 굴어 얼마나 아니꼬웠던가. 그래서 순례에게 저도 모르게 치근거렸던 걸 저 영감탱이가 알까. 희순은 짐짓 상황을 모르는 척 막걸리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럼 오라버니들도 나오세요. 다 같이 집에 가면 되겠네요.”

“풉!”


희순은 마시던 막걸리를 뿜고 말았다. 평소와 같이 고분고분한 말투에는 당돌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영규도 당황스러운지 입을 헤벌리고 순례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례는 부드럽지만 그래서 더욱 단단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제 눈치를 보면서 도란도란하시는지 아주 밖에 있느라 추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영규 오라버니, 제가 며칠 전 며느님을 만났는데요. 재연인가? 손녀분 이름이. 오라버니 손녀 일로 걱정이 많더라고요. 오라버니께 들은 얘기도 있고 해서 제가 몇 마디 조언을 좀 했어요. 오라버니 통해서 답 준다고 했었는데 며느님이 아무 말 안 하던가요? 오라버니, 며느님 얘기 잘 들으셨어요?”


영규는 당황스러운 와중에 며느리가 했던 말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아버님, 함께 탁구 치시는 친구분 자녀분이 사업체를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 우리 재연이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씀 좀 해주세요. 괜찮으시죠?’


확실히 뉘앙스가 좀 이상하긴 했다. 며느리는 손녀를 맡기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그 말이 취직자리를 부탁하는 말이라고 멋대로 생각한 것이다. 취직자리를 부탁한다는 말은 영규의 상상이 만들어낸 말이나 다름없었다. 대강 듣고 멋대로 짜깁기한 사실을 가지고 고군분투한 것인가. 이렇게 경솔할 수가!


“제 딸아이가 교육 사업을 하고 있어요. 애들 진학 상담이나 진학 관련 문제집 만들어서 유통하는 그런 건데 원래는 제가 시작한 사업이거든요. 딸애한테 물려주고 저는 가끔 자문 역할만 하고 있지만요. 그래도 딸애한테 아직은 제 말이 먹혀요.”


‘제 말이 먹혀요.’ 하는 말에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제 말이 먹히지 않는 자식을 둔 희순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순례의 말은 이어졌다.


“사실 전문 상담의와 상담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며느님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더라고요. 저희 쪽에 진학뿐 아니라 심리 상담도 하는 분이 있다고 하니까 그건 조금 솔깃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제가 조만간 집으로 찾아뵐게요. 저도 직접 만나서 얘기 좀 더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전해주세요. 오라버니가 오늘 술 한잔 하자고 하셔서 저는 그 얘기하실 줄 알았는데 희순 오라버니랑 할 얘기가 있으셨나 봐요.”


속사포처럼 조곤조곤 쏟아지는 순례의 말에 영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말을 이해하자 얼굴로 확 피가 쏠렸다. 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지금의 상황이 퍽 민망했다.


덩달아 희순도 얼이 나갔다. 이 여자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평소 우유부단한 면이 없어서 그래도 강단은 좀 있는 여잔가 싶었지만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오히려 허세 가득한 말로 순례의 환심을 사보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을지. 희순의 얼굴은 목부터 시작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순례는 그런 두 사람을 두고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어휴, 저 속은 텅텅 빈 남자들 같으니. 순례는 으레 자신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을 거라 여기고 거들먹거리는 남자, 다른 사람의 흠은 금방 찾아내면서 자신의 흠은 보지 않으려 하는 자기애로 가득한 남자를 많이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굳이 순례가 가진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것을 그대로 보는 척하는 게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규와 희순이 하는 짓을 계속 보자니 속이 터졌다. 나이는 먹었지만 어른은 되지 못한 꼰대들 같으니.


일찍이 교육 사업을 하면서 순례는 많은 아이를 봐왔다. 요즘은 진학과 취업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공부하고 줄을 세워서 서열을 매기고 그에 맞는 자리를 찾아간다. 하지만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시험당하고 좌절한다. 그러다 무너지고 만다.


영규의 며느리가 아이 때문에 곤란해하는 사정을 알면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간 별 이유 없이 받은 도움이 큰 희망이 되는 경우를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남겨둔 남자들의 민망함은 못 본 척하고 순례는 계속 전처럼 유순하고 고분고분하게 행동할 것이다. 물론 이제 영규와 희순의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태도로 돌아올 것이다. 예외 없이 다들 그랬다. 가방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딸애다. 정말 걱정이 늘어지는 애다. 밤늦게 어딜 다니는 꼴을 못 보지. 지가 어릴 땐 상관 말라고 했으면서 이제는 지가 날 단속하려 들다니. 오늘도 굳이 데리러 오겠다고 난리다. 순례는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딸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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