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_연작소설
재연은 꿈이길 바랐다. 순간 이 모든 현실이 시공간 속으로 오그라들고 자신은 퍼뜩 침대 위에서 깨어나기를. 하지만 일이 그렇게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됐다면 재연은 지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지하철 안에는 밀크티 냄새가 진득하게 가득 찼다. 재연의 앞과 뒤에 일렬로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경악과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중에 불쾌감을 담고 탓하는 눈빛도 있었다. 재연은 잠시 그 눈빛을 마주 보고 현실을 직시했다. 현실을 직시하자마자 입에서는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재연은 앞뒤로 몸을 흔들며 죄송합니다, 를 말했다.
그저 밀크티 한 잔이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재연은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다면 절대 역 앞 카페에서 밀크티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출퇴근 시간이 아닌 평일 오전 시간대라 지하철 안에 사람이 적다는 것. 재연이 바닥에 쏟아버린 밀크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밀크티 특유의 진한 냄새만은 재연의 실수를 없는 것으로 할 수 없음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재연은 후다닥 가방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냈다. 티슈 한 뭉치를 뽑아 바닥을 훔쳤다. 떨어뜨린 플라스틱 컵에는 밀크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것을. 불쑥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닥에 흥건히 쏟은 밀크티를 보고 있자니 애초에 사지를 말 것을. 하는 생각으로 치환된다.
재연이 70매짜리 짜리 휴대용 티슈를 다 쓰고 물티슈를 꺼내려고 가방을 뒤적이는데 그를 지켜보고 있던 외국인이 손바닥 만한 작은 휴대용 티슈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들고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밀크티를 훔쳐 냈다. 그 일련의 과정이 형벌과도 같았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아니 현생에는 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당황스럽지만 그렇다고 고약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애매한 형벌을 받고 있는지. 5분 전만 해도 지하철에서 이렇게 바닥을 훔치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껏 낮아진 스스로의 시선에 재연은 문득 자괴감과도 비슷하고 모욕감과도 닮아 있는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아무도 자신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 냄새나는 밀크티의 잔해를 그냥 두고 후다닥 내릴 수는 없었다. 밀크티를 쏟은 직후 자신을 향했던 그 시선들을 뒤로한 채 뻔뻔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휴지를 꺼내 들고 바닥을 훔치고 있는 것이다. 그냥 다음 역에서 내려버릴 걸 그랬나. 알 게 뭐야 여기 있는 사람들 다시 볼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재연은 그러지 못했다. 휴지로 닦아도 닦아도 전철의 흔들림과 함께 이리저리 바닥을 흐르는 밀크티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잠시라도 표정을 찌푸릴 수도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아주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게 그나마 왈칵 몰려드는 수치감을 내보이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어버린 일회용 플라스틱 잔에 밀크티를 훔친 휴지 뭉치를 꾹꾹 눌러 넣었다. 손에 진득하게 밀크티가 묻었다. 그렇게 닦아냈는데도 밀크티의 냄새는 전혀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은 묵묵히 바닥에 붙어 밀크티를 닦아내는 재연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인지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거나 재연을 탓하는 눈빛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놀랍다는 표정이 드문드문 보였다.
재연은 진한 밀크티 냄새를 손안에 가득 담고 차량에서 내렸다. 원래 내리려던 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쯤 했으면 내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리기 전 지하철의 차량번호를 확인하고 지하철 관리사무소에 문자를 보냈다. 뒤처리를 부탁합니다, 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친구를 만난 재연은 그간의 일을 하소연했다. 친구는 딱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그걸 다 치우고 내렸어? 하고 물었다. ‘뭘 그렇게까지 했느냐’가 3분의 1. ‘그래도 치우는 게 낫지’가 3분의 1.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가 3분의 1 정도 차지하는 표정이었다. 재연은 요즘 사람들 민감하잖아. 시외버스에서 음식 같은 거 들고 타도 안 되고, 요즘엔 전철에서도 냄새나거나 쏟을 위험이 있는 음식이나 음료는 못 가지고 타게 한대. 내가 잘못했지 뭐.
태연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재연은 지하철 바닥에서 오리걸음을 하며 밀크티를 휴지로 훔치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괴로웠다. 왜 사람이 높은 곳에 있으려 하는지 알겠다. 어쩜 그렇게도 인간이란 단순한지. 스스로가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 마음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바닥과 붙어 있으면 스스로가 천하게, 바닥과 멀면 멀수록 고귀하게 느껴지는 게 사람이었다. 재연은 그런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쭈욱 빨았다. 빨대를 잡은 집게손가락에서 밀크티 냄새가 훅 끼쳤다.
며칠 뒤 재연은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다. 친구는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봤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밀크티 쏟은 걸 스스로 치우고 내린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라오지 않았을까 해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일단 꽤나 도덕적인 행동이었으니 재연은 일말의 칭찬을 기대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을 도덕적이라 칭찬해주었으면 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친구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며 다행이라고 했다. 괜히 얼굴 팔리는 일이 없어서.
재연은 맞장구를 치며 웃었지만 아주 조금 실망스러웠다. 자신의 그 쉽지 않은 행위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싶어서. 그 밀크티를 치우든 안 치우든 아무도 관심이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걸 꾸역꾸역 어떤 모멸감을 느끼면서까지 하려고 애썼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재연은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역시 똑같이 행동하고 말 것이다.
재연은 밀크티를 쏟은 직후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