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까짓 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유미 Feb 22. 2021

도대체 털이 뭐길래?

이까짓, 털

도대체 털이 뭐길래?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은 ‘마리아’ 열 풍으로 뜨거웠다. 어디를 가나 ‘마리아~ 아베 마리아~’ 가 흘러나왔다. 그 시작은 169cm, 95kg의 육중한 체격 을 가진 여자 한나의 이야기, 영화 <미녀는 괴로워>다. 한나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지만, 미녀 가수의 립싱크에 맞춰 무대 뒤에서 대신 노래를 불러주는 얼굴 없는 가수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꿈도 좌절, 사랑도 좌절하자 전신성형을 감행한다. 

 

과감한 주제로 씁쓸한 공감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이 영화는 동명의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한국판 주인공의 시그니처가 ‘마리아’였다면, 일본판 주인공의 시그니처는 바로 ‘만세’ 포즈다. 주인공은 항상 두 팔을 시원하 게 위로 들어 올리며 크게 만세를 외치는 자세를 취한다. 만세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대체 왜 저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겨드랑이가 털 없이 매끈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전신성형을 한 주인공에게는 몸에서 눈썹과 머리카락을 제외한 모든 털을 제거한 것까지 세상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은 변화였다. (그렇다고 겨드랑이를 자외선에 노출하고 다니다니. 경솔하다. 자외선에 노 출되면 제모한 겨드랑이가 거뭇거뭇해질 수도 있다고!) 

나는 그 만세가 우스우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웠고, 또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포즈 하나로 이렇게나 다양한 감 정의 스펙트럼을 선사하다니. 이것이 작가의 계산이라면 놀랍다. 그리고 작가의 간계에 넘어가고 만 나는 여러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그만, 45도 아래로 시선 을 옮겼다. 

“안녕?” 나의 풍성한 털들에 인사를 건넸다. 너는 왜 오늘도 안녕한 거니.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왜 하필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나는 만세를 선택했을까? 잘록한 허리나 매끈한 다리, 가늘고 긴 목선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아마도 그건 그녀가 그동안 당해야 했던 수모와 수치, 혐오와 닿아 있을 것이다. 

몸에 털이 있는 여자를 향한 혐오의 시선은 미국의 유명한 면도기 회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짐작 하는 그곳이 맞다. ㅈ ㅣㄹㄹ ㅔㅌ ㅡ). 아름답고 완벽한 여 성은 겨드랑이, 팔, 다리에 털 한 가닥 없이 매끈한 피부를 유지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광고했다. 단지 면도기를 팔기 위해서 말이다. 여성에 대한 잘못된 사회 인식과 그걸 교묘하게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콜라보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제모하는 여성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세계 여성 대부분이 제모한다. 이유는 역시나, 아름답고 완벽한 여성에게는 털이 없기 때문에! 


<미녀는 괴로워>의 주인공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모 든 것들이 괄시와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지난한 삶이 끝났음을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고, 그저 보여줌으로써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얼굴 다음으로 겨드랑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자 봐라. 이제 속이 시원하냐, 라고 외치듯.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두 팔을 치켜들고 다녀도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털 관리의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다. 관리하지 않으면 눈총받지만 필사적으로 관리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다. 여자는 털 없는 모습이 익숙하니까. 말하고 보니 서글프다. 물론 내가 털부자라서 더 서글픈걸 테지만. 


어느 부위든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털이 없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지만 있는 것에는 주목한다. 아, 아니다. 사람에 따라 없는 것에 주목하기도 한다. 털이 없는 남자와 털이 많은 여자 그런 식으로. 가끔 털이 (너무) 많은 사람 혹은 (너무) 없는 사람에게도 주목하긴 한다. 취향에 따라 부정적 혹은 긍정적으로. 그러면 또 생각한다.


도대체 털이 뭐길래?



매거진의 이전글 이까짓, 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