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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Feb 22. 2021

위쪽은 밀면 되는데 아래쪽은?

이까짓, 털

위쪽은 밀면 되는데 아래쪽은? 



비키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의 옷이다. 비키니를 입게 된 그 순간까지도 평생 비키니를 살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비키니를 입은 나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부끄러웠고, 그 부끄러움이 나만의 부끄러움일까 싶었다. 나는 역지사지를 아는 지성인이니까.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워터파크라는 곳에 가봤다. 처음이어서 그랬을까. 친구들과 나는 다 같이 비키니를 입기로 대동단결했고 모두 비슷한 마음이었다. 젊음의 치기 한 스푼. 친구들도 입는데 나라고 못 입을까 억지 한 스푼. 억지인 걸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고 싶은 자기 합리화 한 스푼. 물론 쉽지는 않았다. 고민은 배송만 늦춘다는 말처럼, 결국 워터파크에 가기로 한 5일 전에야 비키니를 주문했다. 


비키니는 다행히 전날 도착했지만, 예상치 못한 위기 들이 터져 나왔다. 첫 위기는 가슴에서 시작됐다. 처음 입어본 비키니 상의는 예상 이상으로 실망스러웠다. 나는 한 번도 나의 가슴에 실망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몸에 비해 적당한 크기라고 나름 자부했기 때문이다(어디서 시작된 합리화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데 이 두 뼘만 한 비키니 쪼가리가 나를 좌절시켰다. 소비자의 사정을 잘 아는 것인지 두꺼운 뽕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두 번째 위기는 바로... (예상하셨듯) 털이다. 비키니로 가려도 보이는 이 거뭇거뭇하고 꼿꼿한 친구들을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위쪽은 밀거나 뽑으면 되는데 아래쪽은? 이건 어떻게 해야 해? 그간 가져보지 못한 초유의 의문에 맞닥뜨렸다. 


급한 대로 친구를 찾았다. 워터파크에 가기 바로 전 날이었으므로 민망하고 아니고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답은 ‘밀어라’였다. 다시 물었다. 어디까지? 친구가 답 했다. ‘알아서.’ 그래서 네이버를 찾았다. 나만 몰랐던 놀라운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처음으로 ‘브라질리언 왁싱’이라는 말을 알게 됐다. 제모에도 종류가 있고, 심지어 상황 또는 옷차림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와우. 

정말이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서술하지 않겠다. 그 자세한 과정을 굳이 활자로 옮기고 싶지 않을뿐더러 굳이 그걸 읽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역지사지를 아는 지성인이니까. 


일단 밀어봤다. 비키니를 비집고 나오지 않을 정도 로만. 몽땅 밀어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당시의 나에게는 난이도가 있었기에 양심껏 능력껏 남겨가면서. 하지만 일련의 비장한 과정을 거치고 다시 비키니를 입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밀고 남은 녀석들이 너무 꼿꼿하다는 사실을. 안 되겠구나. 뒤늦은 깨달음은 언제나 당황스러운 법이다. 선비 같은 꼿꼿함도 조선 시대 때나 칭찬받지, 비키니를 뚫고 빼꼼 모습을 드러낸 그 꼿꼿함에는 차마 장하다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두 손이 절로 공손하게 앞으로 모아진다. 

그렇다고 비키니를 포기했느냐, 아니었다. 어쨌든 당장 입을 수 있는 수영복이 손에 든 비키니뿐이었으니까. 요즘처럼 총알 배송 시대도 아니었으니 어떻게든 입어야만 했다. 더 꼼꼼하게 한 번 더 고통과 민망함을 참아보는 수밖에. 


간밤에 그 난리블루스를 춰놓고 당일에는 비키니 위에 티와 반바지를 입었다. 잠도 안 자고 대체 왜 그랬단 말인가. 하물며 비키니를 입겠다고 그렇게 벼르던 친구들도 나와 같은 꼴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비키니는 속 옷이구나. 아니, 나는 속옷을 입겠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인가. 대체 무엇을 위한 대공사였단 말인가. 친구들도 샤워장에서 조금 놀라워했다. 내가 거기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이제는 수영복을 입을 때 굳이 제모하지 않는다. 해변이나 워터파크에서 수영복은 그저 물에 젖어도 금방 마르거나 물을 많이 먹지 않는 기능성 속옷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영복만 입은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깨달았다. 그래,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왜? 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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