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_나만 창피한 거 아니죠?
마치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그래, 뭐 다를 건 없다. 그 날 주신(酒神)이라는 새로운 신이 강림한 놀라운 우주를 맞이했다는 건 사실이니까. 처음 주정이란 것을 했던 날은 대학교 엠티에서였다. 처음 본 사람들과 단체로 어디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유스호스텔에 가서 술을 진탕 마신다는 것은 누구의 상상력에서 나온 계획이었을까. 다시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임이 분명한데 당시에 나는 얼빠진 새내기였고, 선배들이 그렇게 하니까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고, 이 놀라운 세계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저녁이 되어 방마다 모여 앉아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걸 당연하게 행사했기에 왜 꼭 술을 마셔야 하는지 의문을 느끼지도 못 했다) 내 옆의 이 사람들이 과연 정말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 맞나 싶게 친근해진다. 마음도 푸근해지고 왠지 몸은 흐느적거리게 되고 그렇게 술과 내가 하나가 되고 그런 나와 그들이 또 하나가 되면서 주신의 가호 아래 우리는 하나! 를 외쳐댔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고, 쭉쭉 들어가고, 쭉쭉 들어가는 술을 더 들어가게 하기 위해 게임을 시작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마시면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용했다. 그리고 종종 들려오는 충격적이고 울컥한 사건, 사고 소식은 남모르게 나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나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면 정수리가 무언가에 뽑혀 나가는 듯한 저릿한 감각이 찾아온다.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남들과 섞이려고 모난 돌이 되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그 자리를 지킨 것이라는 깨달음은 나이가 들고 나서야 찾아왔다.
하지만 이 때는 깨달음이란 스님이나 신부님에게만 찾아오는 신의 선물인 줄 알았고,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신의 선물은 술이었다. 처음엔 쓰게 느껴지던 소주가 점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 편 내가 술이 센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착각에 빠져 바구니 게임 1)을 하면서 의리를 과시했고, 바구니 게임이 끝나면 왕 게임 2)이 시작되고, 그게 끝나면 자율 게임에 돌입한다. 이쯤 되면 다들 취해서 단체로 하는 게임은 진행이 안 된다. 나와 비슷한 정도로 취한 동기들이 선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있었다. 신기하게 나를 포함한 새내기들은 눈이 풀린 좀비 같았는데 선배는 눈동자에 윤기가 돌고 반짝 빛이 났다. 아직도 '와, 저 사람은 진짜 술이 세구나. 미쳤다.'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 선배가 정말 미친놈이 된 건 순식간이었다.
왕 게임이었다. 내가 걸렸고, 아무 설명 없이 방바닥에 누우라고 해서 누웠다. 왜 누우라는 거지, 이대로 자라는 건가. 아, 안 되는데, 아직 애들이랑 더 놀고 싶은데. 여기서 빨리 친한 애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학교 다니면서 혼자 밥 먹는 거 싫은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방바닥에 홀로 누워 눈알만 도록도록 굴렸다.
나를 방바닥에 눕히고 사라진 선배는 한참 후에 돌아왔다. 기다리라는 말에 정말 다들 집에서 키우는 개라도 되는 것처럼 얌전히 기다렸다. 그리고 선배가 처음 보는 남자 동기를 데려왔을 때,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 그래, 상상하는 그것이었다. 어디서 술에 취한 어리바리한 새내기를 데려온 선배는 그 새내기에게 누워있는 나를 가리켰다. 나는 순간 굳었다. 그리고 지켜보던 다른 동기들도 굳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전후 맥락을 파악하는 건 순식간이었지만 그 맥락을 파악하는 순간 충격에 몸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술이 확 깼다. 그런 와중에 선배가 시범을 보인다면 누워있는 내 위로 팔 굽혀 펴기 자세를 잡았다. 와, 술이 깼는데(아니, 안 깼더라도),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은 고문 그 자체였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선배와 부딪힐까 봐. 뭐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욕이 나올까 봐.
그 미친 선배가 팔 굽혀 펴기를 한 번 하고 시범이 끝났다며 일어섰다. 얼음땡을 누가 외쳐준 것처럼 내 몸이 움직였다. 급하게 일어나느라 선배의 턱과 내 이마가 부딪혔다. 선배는 으억!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발랑 자빠졌다. 본의 아니게 박치기 기술을 시전 한 것 같이 되었지만, 고의적인 마음은 없었다(그 순간에는). 선배는 화를 냈고, 화를 내면서도 다시 나에게 누우라고 했기에 주눅이 들어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시 눕기는 싫었다. 겨우 스무 살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다. 누우면 안 된다는 걸. 지금 이 한 번의 굴복이 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내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걸 알았는지 모른다. 한 번,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생각해버리면 이후에도 계속 그것을 반복할 것이다. 사람은 꽤나 경험에 의존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한 번의 경험이 앞으로의 모든 걸 결정지을 수 있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동기들은 나와 함께 안절부절못할 뿐이고, 다른 선배들은 모른 척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미친 선배는 새내기들에게 수치심 3)을 주는 게임을 시키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특히 여학생에게.
나는 이렇게 대학생활이 망가지는구나, 하는 생각마저 했다. 선배가 누우라고 소리치는 자리가 관 뚜껑이 놓일 자리처럼 보였다. 누우면 '나'라는 자아가 깊은 수치심에 죽을 것 같았고, 안 누우면 '나'의 대학생활이 비참해 죽을 것 같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 가지다.'라고 말한 게 누구였더라. 햄릿 4)인가, 아니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했지. 수백 년 전 비극의 주인공도 선택지는 두 가지였는데(살든, 죽든 매한가지인 삶이었을 햄릿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왜 죽느냐, 죽느냐 밖에 없었을까.
그때 미친 선배가 데려온 새내기 남자애가 말했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거 못 합니다."
"... 그런 거?"
미친 선배의 눈이 순식간에 가자미눈이 되었다. 쭉 찢어진 가자미 눈. 너무 못 생겨서 놀랄 정도였다. 방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것 같았다. 모른 척하고 있던 다른 선배들도 안절부절 못 하던 동기들도 얼어버렸다. 입을 헤벌리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제가 팔 굽혀 펴기를 못 해서요. 죄송합니다."
"...... 아니, 무슨 남자 새끼가."
격한 말이 나오려는 데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른 선배가 벌떡 일어나 그 입을 막았다. 나중에 저 손에서 썩은 걸레 냄새가 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꼿꼿한 자세로 앉았다. 절대로 눕지 않겠다는 기백을 담아서.
미친 선배를 붙잡은 김에 어리바리한 새내기인 줄 알았는데,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선배들이 방에서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아마 그 새내기 남자애의 말에 나를 포함한 동기들의 표정이 결연하게 변했기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후 나는 동기들에게 격렬한 위로와 사과를 받았다. 도와주지 못 한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대인배인 척 넘어갔지만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 날의 수치심도 함께.
그때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던 그 새내기 남자애는 과가 같았기에 종종 마주쳤다. 내가 좀 더 변죽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때 고마웠다는 말이라도 건네었을 텐데. 나는 그저 그 마음을 눈빛에 담아 열렬하게 인사를 했을 뿐이다. 상대는 그마저도 조금 부담스러워한 것 같지만.
시간이 착착 흘러, 새내기였던 나는 선배가 되었고, 엠티에서의 기억 때문 에라도 후배들에게 그런 일이 없도록 발 벗고 나서는 선배가 돼야지, 했던 것과는 별개로 학년이 올라가자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무슨 팀플 과제는 그렇게 많고, 공부해야 할 과목이 그렇게 많고, 봉사활동도 해야 하고, 자격증도 알아봐야 하고, 책은 읽으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읽고 싶은 게 많은지.
처음 새내기였을 때 간 엠티 말고 나는 그 어떤 엠티도 가지 않았다. 물론 과모임이나 개강파티, 종강파티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바쁘다는 건 핑계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막을 자신도, 지켜볼 자신도 없어서였겠지. 지금의 뻔뻔함이 그때 있었더라면 좀 더 속 시원하게 그 미친 선배에게 한 마디쯤 할 수 있었을 텐데.
"야, 이 미친 선배 ㅅ ㄲ 야. 니 여동생한테도 거기 누우라고 해봐!"
1) 함께 술을 마시는 이들을 한 바구니로 치고, 소주 한 병을 돌아가며 나누어 마시는 게임이다. 앞의 사람이 적게 마시면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다 마셔야 하는 일종의 의리 게임인데 의리는 개뿔. 마지막 남은 사람 골로 보내자는 거다.
2) 제비뽑기를 해서 '왕'을 뽑으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대개 술자리에서는 누구누구 뽀뽀해라, 누구누구 사귀어라, 등의 요구를 하는데... 요즘도 그런가? 요즘 애들은 왕이 되면 뭐하라고 하는지?
3)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 이지만 어디 가만히 있는데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끼는 마음이 생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왜 부끄러운 짓을 하는 건 따로 있는데, 그 부끄러움을 내가 느껴야 하는지. 망할(망구).
4)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 '햄릿'의 주인공.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에서 줄거리 검색 추천. 원작은 희곡 형태라 읽기 힘들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