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에세이] 그날 그 기사분은

#020_나만 창피한 거 아니죠

by 정유미

_그날 그 기사분은 친절했다(feat. 무서움 한 스푼)



몇 년 전이었다. 그때의 난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담대했다. 혹은 술기운에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다른 날과 같이 별 이유 없이 술을 진탕 마신 날이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이유로 마신 술은 나를 그렇고 그런 상태로 만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아마 무방비하게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이다.



깊은 잠을 자다 깨어났을 때, 아니 물론 스스로 깨어난 건 아니었고, 누군가 흔들어 깨우길래 눈을 떴더니, 버스 기사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한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기사님이 나를 깨웠을 때 버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버스는 차고지에 들어와 있었다. 밖엔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는데 마치 연쇄 살인이라도 일어날 듯한 그런 밤이었다. 자정이 한참이나 넘은 시간이었고 차고지에서 집이 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버스 두세 정거장쯤 떨어진 거리였다. 일단 버스에서 나가야 했다.



취해서 비척거리는 나를 보면서도 기사님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한심하다는 표정도 아니었고, 경멸하거나 어이없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냥 원래 그렇게 무뚝뚝한 사람인 양 비척거리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집이 어디세요?”

“… 요 근처요.”

“태워다 드릴까요? 제 차로.”

“…아, 네. 하하 핫. 그럼 감사하죠.”



이쯤 되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다. 어느 정도 위기감을 가져야 했음이 옳을 것인데 술에 취한 나라는 인간은 어쩜 그리 해맑았는지 '정말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죄송해서 어쩌죠.'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 기사님도 조금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고, 사실 지금도 무슨 생각으로 기사님이 나에게 그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비가 쏟아지는 차고지를 걸으며 기사님의 개인 승용차가 있는 곳까지 가는데도 어째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냥 아는 사람 차를 공교롭게 얻어 타는 느낌. 그런 가벼운 기분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술의 힘이지, 하고 나중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일말의 이성은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 친구(J가 아니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버스 기사님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남자 친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절대로 전화를 끊지 말라고도 하고, 차 번호를 혹시 보았느냐고도 묻고,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고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또 제정신이라고 하나도 안 취했다고 말대꾸도 했더랬다.



아무튼 그 당시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나중에는 자꾸 <살인의 추억>이라든지 <추격자>라든지 하는 스릴러 영화가 생각나며 소름이 돋았던 것은 참으로 뒷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기사님은 맨날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여동생이라도 떠올라 나를 데려다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술에 취한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밤에, 그것도 비가 오는 밤에(이건 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상황 상) 덥석 차에 태우는 것은 위험한 상상을 부추기는 감이 있었다. 아니, 뭐 그래서 기사님이 뭘 잘 못 했다는 건 아니고. 그분은 선량하신 분으로 나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어주셨을 뿐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술에 취해서 모르는 남자 차를 덜렁 얻어 탄 나라는 인간에 대한 깊은 경각심이 생겼달까. 누굴 탓하리, 그날 그 기사분은 친절하기만 했다.



아, 정말 그때 그 기사분. 이 글을 읽고 생각나는 어이없는 과거가 있으시다면 연락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덕분에 집에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선한 호의를 의심해서 죄송하지만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차에 태워 주신 걸까요? 그냥 좀 여전히 궁금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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