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너는 태어나지도 못할 뻔했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일뻔한 일을 말씀하셨다. 결혼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모님은 다툼이 잦았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증언(?)이 다르므로 진실은 알 수없지만 공통적인 말씀은 나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유산을 당할 뻔했다. 수술 날짜(물론 합법적인 건 아니었겠지만)를 정해놓고 극적으로 화해한 두 분 덕분에 나는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사건을 놓고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희는 몰라.'라고 하셨고, 아버지는 '그래도 우리 딸 낳은 게 얼마나 잘한 일이야.' 하셨다. 지금 두 분은 말끔하게 이혼하시고 각자의 삶을 살고 계신다.
처음 유산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서 듣게 된 건 행운이었다. 술에 거하게 취한 아버지가 꼬이는 혀로 '그때 우리 딸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어'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 적어도 나의 탄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씀해 주셨다.
'그래도 나를 낳은 건 후회하지 않으시구나. 다행이다.'
한숨 쓸어내리는 동시에 좌절감이 밀려왔다.
'나는 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까.'
이상주의자인 아버지는 과거 수직적인 회사 시스템에 불만이 많으셨다고 한다. 그러다 직장 상사와 트러블이 생겨 회사에 출근하지 않자, 어머니와 이 문제로 이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혼 이후에도 자녀의 양육을 책임진건 어머니였다. 과거에는 여성이 홀로 새파란 두 아이를 키우기에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자존심이 센 어머니지만 고개를 숙여야 했고, 체구가 작지만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하셨다. 사람으로부터 상처받더라도 생계를 위해 다시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아다니셔야 했다. 어머니는 넘어지셨고, 많이 지쳤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외조부모님은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지쳐도 쉴 곳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급식을 무료로 지원해 주었다. 담임 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한부모 가족이었던 나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거절했다.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먹여주고 키워줬더니.."
어머니는 슬퍼하셨다. 본인이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데 딸이 그 기회를 거절했다며 망연자실해하셨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서글프게 우셨다. '자식새끼 다 키워봐야 소용없다'라고 한탄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었고, 중학교에서는 그런 낙인이 찍히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눈물이 보기 싫었고, 분노가 일렁였다. 가난이 싫었다. 가난이 우리 가족을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입덧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요."
임신 22주, 입덧이 사그라들면서 긴장이 풀렸다. 거실에 친정어머니와 마주 앉아 아이를 가지는 과정이 쉽지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6주 차부터 입덧 증상이 나타나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엄청난 후각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문을 닫은 방안에 있어도 부엌에서 냉장고문을 열면 식재료 냄새가 강하게 속을 자극했고 구역질을 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머리카락의 샴푸 냄새 때문에 토를 하기도 했다. 체중이 계속 줄었고 수분을 섭취할 수 없어 수액을 맞으며 버텼다. 20주 차쯤 되니 입덧이 많이 진정된 덕분에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나도 너 가졌을 때 입덧이 너무 힘들어서 병원에 가서 지우고 싶더라."
아무렇지 않게 날 지우고 싶었다고 말하는 우리 엄마. 나라면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엄마는 나와 참 다르다. 씁쓸한 기분과 함께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8-9살쯤 되던 해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부모님 이혼 이후 인생 최대의 방황기를 겪었다. 나를 항상 예뻐해 주던 아빠는 곁에 없었고, 같이 살고 있는 엄마는 친엄마이지만 편한 사이가 아니었다. 사람보다 집에 있던 인형들과 친해졌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도 가지 않았다.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책상 위에 올려진 만원을 훔쳐 슈퍼에서 간식 플렉스를 한 적도 있다. 어느 날 참다못해 화가 난 어머니가 장롱에서 허리띠를 꺼내 내 목을 졸랐다.
죽이려는 마음보다는 겁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고분고분하게 군말 없이 엄마말을 잘 따르길 바랐을 것이다.
이후 엄마의 바람대로 나는 점점 순종적인 아이가 되어갔다. 사달라는 것도, 해달라는 것도 없이 서서히 삶의 색채가 없어졌다.
이렇게 첫 번째는 엄마의 뱃속에서, 두 번째는 엄마의 손으로 내 생명이 위협되었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수없이 다짐했다.
'엄마에게 기대지 않겠다.' 그리고
'절대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