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쪼 Aug 28. 2023

게을러서 그런 줄 알았지

그때의 나를 위하여 1


#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렇게 게을러서 어떻게 먹고살래?"




이혼 후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느라 생존의 늪에서 발버둥 치던 어머니는 늘 우리 남매가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고 먹고살지를 걱정하셨다. 그래서인지 각종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자녀들의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머님이 걱정하실수록 더욱더 자녀들은 의욕을 잃어갔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보니 어머니 말씀 그대로 '게으르고 세상물정 모르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막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일이었다.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어 1학기 기숙사비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저녁에는 아르바이트하고 낮에는 늘어지게 늦잠 자느라 날짜를 지키기 못한 것이다. 급하게 대학 행정실에 전화를 했더니, 입실하는 날에 기숙사비를 지불하면 된다고 하였다. 어머니에게 또 혼날까 봐 그 사실도 숨긴 채 입실 당일이 되었다.


기숙사 사관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입실 절차를 밟을 수 없다고 하였다. 사관의 단호한 모습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기숙사를 나왔다. 내가 기숙사 앞을 서성이는 동안 어머니는 사관님께 고개 숙여 사과하고 빌었다. 그렇게 게으르고 못난 딸은 겨우 입실할 수 있었다.

더 최악인 것은 내가 어머니에게 별다른 미안함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게으른데 뭐. 이런 일은 늘 있는 일이지.'




 이후로도 비슷한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대학 과제를 미루다가 마지막날 겨우 끝내고 교수님 연구실에 몰래 넣으려다 들킨 일, 호주 인턴쉽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영어수업 수강 일자를 채우지 못해서 놓친 일, 졸업 후 취업한 직장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사한 일  등. 모든 상황이 내가 게으르고 끈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갈수록 합리화 기술도 발전되어 갔다. 신경 쓸게 많은 탓, 피곤한 탓, 직장 내 구조적 문제 탓, 사람들이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탓 등 창의적인 변명과 핑계들을 만들어 갔다. 마치 '나는 문제가 없지만 주변에 환경에 문제가 있어.'라는 식의 태도였다. 모든 일에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일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 같았다.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 책 읽어볼래?




"우와- 임신 축하해! 이제 뭐 하고 지낼 거야?"

"음.. 글쎄"



당시 미용실을 운영하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나누었다. 따뜻한 물로 머리를 부드럽게 감겨주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



"책 읽어라 책!"

"책?"

"응! 예전에 너 책도 읽고 그랬잖아. 좋은 책 빌려줄게."



평소 독서를 즐기는 친구는 만날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질문과 통찰을 주곤 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멋있다, 부럽다 등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라고 여겼다. 그 친구이기에 가능한 모습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그럴까."

"응! "



당시엔 '시간도 많은데.. 한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의 눈빛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확신을 느꼈다. 책을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후 관심이 가는 대로 책을 한 권씩 읽어나갔다. 알아보니 집 근처 도서관에서도 쉽게 책을 빌릴 수 있었다.

손만 뻗으면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은데, 손을 뻗어 볼 생각조차 안 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평소 관심 있던 심리학이나 육아 코너에 있는 서적을 한 권씩 훑어본 후 대여해서 읽어갔다. 처음에는 읽기 쉬운 책 위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된 글을 주로 읽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책과 함께 하는 일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땐 몰랐다. 그때의 단순한 선택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은.


마치 겨울 땅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봄이 올 준비를 하듯이.





 

처음에는 책을 읽으며 과거와 현재의 삶까지 이어지는 선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파헤쳐가는 경험을 했다. 책 속 저자의 스토리가 마치 내 이야기처럼 가슴을 아리게 파고들 때도 있었다.



'나만 이런 경험을 한 게 아니구나.'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서 꽁꽁 잠가놓았던 녹슨 문을 향해 시선이 향하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가놓은 건지 잘 돌아가지 않는 문고리를 억지로 삐걱대며 열어 내었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부모님이 이혼하던 날의 모습,

그보다 오래전부터 느꼈던 불안감,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인 것 같은 죄책감,

울먹이며 분노하는 엄마를 보며 느꼈던 절망,

부모님의 짐이 되기 싫어 욕구를 감내했던 날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무력감 등


쾌쾌하게 묵은 기억들과 실타래처럼 엉킨 감정들이 들쑥달쑥 고개를 들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할 거야.'




그곳에 내가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양팔로 다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내가 있다.   

다가갈 수 없다.

누군가에게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잔뜩 몸에 힘을 준 채 버티는 아이의 어깨에 손조차 올릴 수 없다.

누군지 잘 알지만, 선뜻 손을 건네지 못한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





'거기 있었구나.'























작가의 이전글 운동은 괜찮은데, 헬스장은 가기 싫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