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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쪼 Sep 13. 2022

바다를 보고 운 이유

의존 욕구

# 어느 날


"이것 봐! 넘어지잖아! "


며칠 전 아이와 함께 바닷가에서 파도를 밟으며 놀다가 아이가 넘어지자 반사적으로 한 말이다.

아이가 다칠까 봐 정돼서 그런 걸까? 이런 반응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용감한 척하기로 했다.


"무서우면 엄마에게 와. 파도야, 덤벼라!!"

"응! 파도야 아~ 덤벼라~~~ "


시원하게 춤추는 파도를 보며 큰소리 뻥뻥 치긴 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검고 큰 파도가 아이를 덮쳐버리고  깊은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은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아이와 바닷가를 여러 번 와봤지만 이전까지 가져본 적 없는 불안이었다.

일단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씩씩한 척 파도에게 시비(?)를 걸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아이가 잠들고 고요히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왜 그런 무서운 상상이 들었을까?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거지?'

 



# 바다의 기억


바다는 나에게 고향 같은 곳이다.

꿉꿉하게 짠내 나는 바다 냄새를 맡고 있으면 어린 시절 즐거웠던 추억이 생각난다.


열 살이 되던 해였다. 자주 다투던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IMF 여파로 아버지가 사업을 접으셨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우리 남매를 데리고 통영에 계신 할머니 댁으로 갔다. 그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커다란 빚과 맨몸뿐이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를 따라 어업을 시작하셨고, 집에는 두 살 터울의 오빠와 나, 할머니가 함께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엄마가 되어주었다.


 할머니 댁은 통영 한산도라는 섬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조선의 수군을 이끌고 왜적과 대적했던 '한산도 대첩'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곳에서 산 1년은 지금 떠올려보아도 웃음이 지어질 정도로 즐거웠고, 다채로웠다.

 여름이면 동네 오빠들과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놓고 가신 낚싯대로 어쩌다가 물고기를 잡게 되면 그날 저녁 식사메뉴는 생선 미역국이었다.  갓 잡은 생선으로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미역국은 정말 꿀맛이었다.

매일 신나게 놀았다. 구슬치기, 축구, 수영, 피구, 비석 치기 등등 끊임없이 놀이를 만들고 재창조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동네에서 뛰놀다가 어른들과 마주치면 '누구 딸내미고?' 하며 반가워하셨다. '김 oo 씨 딸이에요 ~' 하면 모두가 친척처럼 아는 사이가 되었다. 섬이라는 공간이 주는 제한적이면서도 정겨운 느낌이 좋았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나서 잃었던 소속감을 섬이라는 공간에서 채웠을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바다라는 공간에 있을 땐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잔잔하게 웃음이 나곤 했다.


그런데, 그런 바다에서 오늘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사건 하나가 생각났다.

3년 전쯤이었다. 20년간 어부를 하셨던 아버지가 타신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부는 구조되었고, 몇 분은 아직 바다에 표류되어 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었다.

'지금 이 순간에 아빠가 차디찬 바다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몹시 두려웠다. 그때만큼은 내가 안전한 육지에서 숨 쉬고 있는 게 죄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아버지는 구조되셨지만, 같이 현장에 계시던 동료들 중 실종된 분도 있었다. 당시에는 생명을 구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 일이었지만, 이후 아버지는 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

병원에 입원하신 동안 아버지에게 보호자가 필요했다. 나 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다. 남편이 회사를 쉬면서 아이를 돌보았고,  나는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향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해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이 경계가 얕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 숨겨진 감정


기억이 거기까지 닿자 거실에 흩어진 장난감을 주어 담던 손이 멈추었다. 서글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억... 엉엉"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났던 아버지의 사고. 그때 당시 모른 척하고 싶었던 나의 감정들이 하나씩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도움이 필요했어. 아무도 없어서 두려웠어. 앞으로도 내 생활을 포기하고 아빠를 도와줘야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어.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그 상황에도 내 인생을 걱정하는 게 이기적으로 느껴졌어. '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구나. 아버지를 덮쳤던 그 검은 파도가 내 마음속에 남아 있구나. 그 파도가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이마저 덮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구나.'

그 사고 이후로 바다는 우리 가족의 삶을 뒤흔들 수 있는 무서운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기대고 싶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시엔 그 상황을 버티기 위해 모른 척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 감정을 알아차리자 내 마음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욕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움받고 싶은 욕구'였다.


의지하고 싶다.

기대고 싶다.

도움을 받고 싶다.


 아버지의 사고 당시 간병을 함께할 가족이 없었다. 오래전 아버지와 남이 된 어머니는 고려해볼 사항이 아니었고, 당연히 자식인 나의 몫이라 하셨다. 친오빠는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몸보다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상황이 다시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 이후로 누구와 살든 내가 짐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부모님에게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잘 듣는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면 관계를 멀리 했다. 

 조건 없이 기대고 싶었던 욕구는 '독립'이라는 가면을 쓴 채 살아왔다. 그렇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가짜 어른이 되었다. 혼자서도 척척 잘 해낼 것 같았지만 절실히 도움이 필요할 때는 몸과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지치고 힘들 때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 줄게.


- god '촛불 하나' 가사 중 -




마음이 지쳤을 때 혼자서 많이 불렀던 노래이다.

아이가 생긴 이후로,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했다. 결론적으로는 위의 노랫말 가사처럼 지치고 힘들 때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고 싶었다.

마음껏 여행하다가 잠시 쉬어가는 포근한 휴식처처럼, 충전소처럼.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과거를 보는 관점을 바꿈으로써 미래를 바꿀 수는 있다고 한다. 나는 우리 부모님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들에게 배운 좋은 점을 발전시키고, 상처받았던 기억을 통해 성장할 것이다. 상처의 대물림을 막고, 넓고 크게 여행하듯이 삶을 즐기는 나와 우리 가족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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