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

by 피카타임

지난 목요일에 아빠와 어떤 카페에 들렀다. 2층에 자리를 잡아 아빠를 앉혀두고 주문을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파는 책 3권이 진열되어 있었다. 무심코 책의 에필로그를 읽어보고서는 카페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 책의 작가가 카페 주인이었다고 말할지,

그 카페의 주인이 책의 작가였다고 말할지 잠시 망설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진열대의 책을 펼쳐 들었다. 서너 페이지 읽었는데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조용한 카페에 좋아하는 앰비언트 음악이 흐른다. 창밖은 한여름 벚나무 잎이 거리가 안 보일 만큼 무성하다. 그리고 스콜 같은 비가 쏟아졌다가, 그쳤다가...


완벽한 순간인데 문득 짙은 어두움이 마음을 뒤덮는 게 느껴졌다. 기억 속에 완전히 잊고 있던 "꽃들에게 희망을" 이란 책이 떠오른다. 어리석음의 표본처럼 보였던 굵고 징그러운 애벌레들이 그 기둥을 힘겹게 기어오른 후... 어떻게 됐더라... 끝까지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 그들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지만... 진실을 마주한 몇몇은 울지 않았을까.

울었을 것 같다.


그러자 그 완벽한 순간,

망했어... 망한 거야... 갑자기 뭔가가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냥 삶이 망한 것 같았다.


그날 좀 힘들었던 것 같다. 카페에서 카페 주인이 쓴 책 한 권을 사서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무거운 마음과 무거운 가방이 합쳐져 하루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퇴근길. 늦은 밤 더운 공기에 풀 냄새가 난다. 시원함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바람이 훅 불자 고개 들어 보지 않아도 하늘위 별자리가 그려졌다.

그때 마음이 아주 가느다란 숨을 쉰다.

1층 엘리베이터 안,

이번엔 현관문을 열면 테이블 위에 있을 키보드가 떠오른다. 그리고 영어 회화 책, 얼마 전에 겨우 공식 하나를 터득한 풀다 만 문제, 폴더 가득 쌓인 글 조각들...

두서없이 떠오르는 장면들에 마음의 숨이 굵어진다.

타. 닥. 닥닥. 분간하기 힘든 몇 마디 모스 부호만큼 심장도 두근거림의 강약이 살아난다.


그러자 망한 게 아니었네... 망한 게 아니라 오늘만 망한 거였나 보다. 하루쯤은 망할 수도 있지.

하던 일들을 계속하기로 했다. 내일은 망하지 말아야지. 모레 또 망한 기분이 들더라도 이틀 내내 망하며 살진 말아야지.


그리고...올해도 7월 20일.

첫사랑 생일이다. 친구들 생일, 첫 벚꽃 핀 날, 첫 매미 운 날, 첫 이사한 날... 저절로 기억되는 날짜들이 있는데 그 목록에 7월 20일이 올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17살 때 알기 시작해 20대 초반까지 소식을 계속 묻고 전해 들으며 지내던 어느 해, 내가 싫어하는 기집애와 연애를 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묻지도 찾지도 않고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도...


날짜가 참 예쁘지 않은가.

7월 20일.

청량한 그 날짜가 한 해 한 해 지날수록ㅡ 어째, 더 또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