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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의 시간

by 최유나


나는 비혼이고 돌봐야 할 자식이 없어 그런지, 가능하면 오래 살고 싶다거나, 몇 살까지는 꼭 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웃는 얼굴로 집을 나선 젊은이들이 바다 위에서, 길거리에서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도 보았고,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중병 앞에서는 결국 무력해지는 현실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건강했던 엄마가 어느 날 환자가 된 후, 엄마의 숨결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나는 엄마의 유일하며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지만, 그저 환자를 지켜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무기력함은 내 생명에 대해서도 초연함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능력, 그 너머의 것이었다. 나의 생명이란 온전히 하늘의 보살핌에 달려있는 것이었지 내 연약한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이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당사자의 손에는 잡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는,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이나 꿈을 갖지 않으려 했고, 또 갖지 않게 되었다. 그저 지금을 의미있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나에게는 최선이자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래서 나는 신(神)에게 무엇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내가 처해 있는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달라는 기도만을 했다. 나의 최선에 신의 자비가 있어야지만 나에게 미래가 허락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바람과 비를 맞아가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헤매고 떠도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우리집에는 엄마가 쓰던 물건이 여전히 많다. 내가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기도 하고, 뜻밖의 곳에서 우연히 발견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다용도실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사용하다가 남긴 새치 염색약을 발견하기도 했고, 엄마가 쓰던 손수건이나 양산은 안방에서 내 방으로 자리가 옮겨지기도 했다. 엄마가 곱게 접어두었던 스카프들은 그 날씨와 계절에 맞추어서 내 목에 둘러지고, 엄마가 소중히 간직하던 귀한 액세서리들도 역시 내 손가락과 팔목에서 대를 이어 그 빛을 발한다. 나이가 들어도 곱고 귀여운 것을 좋아했던 엄마의 취향 덕분에, 그리고 나도 엄마와 닮은 취향을 물려받은 덕택에, 엄마의 앙증맞은 소품들은 엄마 것인 듯 원래부터 내 것인 듯, 늘 나와 함께 한다.


어느 날 외출을 준비하던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남긴 액세서리를 손목과 손가락에 올리다가 엄마가 지금까지 내 곁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나는 60대 초반이었던 엄마의 취향과 분위기는 알고 있지만, 그 이후의 모습은 모르고 앞으로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년의 엄마는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녔을까. 그리고 머리모양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아프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깨까지 길게 길러 굵은 웨이브로 스타일링 했을까, 아니면 짧은 커트 머리를 하고 있었을까. 병상에서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짧은 커트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 머리도 참 잘 어울렸지. 어쩌면 관리하기 쉽다며 본인이 짧은 머리를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머리카락 염색은 했을까, 아니면 은색의 머리카락을 빛내며 다녔을까. ‘이제는 하얀 머리카락도 괜찮다’며 염색을 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마스카라도 여전히 꼼꼼히 했을까.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의 주인공인 아름다운 70대 여성처럼 하얀 커트 머리에도 눈화장은 여전히 했을지도 몰라. 만약 엄마가 더 이상 화장하기 싫어했다면, 내가 ‘밀라논나’의 주인공처럼 엄마를 꾸며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도 상상하지 못하는 다른 분위기의 화장법을 엄마가 찾아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리고 얼굴의 주름은 얼마나 깊어졌을까. 주름이 나이에 비해 별로 없었던 그때 얼굴과 똑같았을 수도, 아니면 세월이 흐른 만큼 내가 기억하는 그때와는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엄마는 아름답고 예쁜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겠지.


하루는 저녁 늦게 동네를 산책하다가 올해가 푸른 뱀의 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엄마는 1953년생 뱀띠. 만 예순한 살이던 해에 돌아가셨으니, 엄마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만 일흔두 살이었을 것이다. 푸르스름한 가로등 빛을 맞으며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적어도 일흔두 살까지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 욕심과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하늘의 자비가 나에게 닿고 신이 허락한다면 그 너머의 시간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닮은 존재로서, 엄마가 보내지 못한 노년의 시간을 한번 살아보고 싶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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