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달, 지독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글감의 고갈 때문이다. 아니, 고갈이라기보다 글감의 획일성이라 말하는 것이 더 옳겠다. 약 2년간의 일본 유학생활, 그리고 연이어 겪게 된 엄마의 갑작스러운 투병과 장례. 하루하루가 버거운 시간 속에서 4, 5년을 정신없이 보냈더니 다른 것은 내 머릿속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엄마가 떠났다는 것이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어느 날, 최근 몇 년 사이에 적어낸 내 글들을 살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아뿔싸. 글들은 일본과 관련된 것이거나 엄마의 투병이나 죽음에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물론 글감의 배경만 같았을 뿐, 글의 주제는 모두 달랐다고 말하고 싶지만.
잘 쓰든 못 쓰든, 나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다. 이것은 나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체성으로, 사실은 소명의식도 느끼고 있다. 내킨 김에 좀 더 고백하자면, 누구보다 참신하고 솔직담백한 글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있다. 둥둥 떠다니는 먼지처럼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생각의 파편들을 하나로 모아 뼈대를 세운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에피소드를 요령 있게 더하면 하나의 글이 완성되는 것이다. 형체 없던 잡념이 문자로 가시(可視)화되어 내 앞에 드러났을 때의 환희는 글을 써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운 것은, 글의 재료에 대해 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공포이기도 하다. 어느 수필가 선생님은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더 이상 작가라 할 수 없다 하셨다. 그러니 작가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글감이란 ‘생존 무기’를 늘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요즘의 내 글감에는 ‘새로움’이란 가치가 부족한 것이다.
글에 대한 고민이 짙어질 때는 다른 이의 글에서 길을 찾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나는 갈급한 마음으로 책장 앞에 섰고, 책 한 권 한 권을 짚어가며 꼼꼼히 훑었다. 그러다 최인호의 『인생』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것은 작가의 치열한 투병기였다. 나는 그의 열렬한 독자는 아니었고, 그를 만난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그가 내 엄마와 비슷한 나이에 암이라는 같은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글쟁이’였으며, 그와 우리 가족이 같은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에 묘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책이라면 내게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하며 책을 슬며시 꺼냈다. 그리고 겉표지를 넘기자마자 반짝 빛나고 있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내가 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책장은 창 너머로 비쳐오는 봄 햇살 아래에서 수줍게 웃고 있었다.
“책에 실린 글들이 종교적이어서 보편적인 것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작가는 어차피 그때그때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들을 쏟아내기 마련이니까.”
너무나 당연하고 단순한 말이었지만 뭔가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훨씬 긴 시간을 작가로 살았던 사람이어서 일까. 그 담백한 문장에는 자못 비장함까지 배어 나왔다.
사실 그렇다. 글 쓰는 사람은 그때그때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글을 읽고 있으면 작가의 성품과 생활이 보이고, 작가의 생각과 환경이 바뀌면 변한 세계관 또한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글 쓸 때의 도구를 ‘펜이나 컴퓨터 자판’이라 할 것이 아니라, ‘글 쓰는 사람 그 자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누군가의 수필집을 읽고 나면 그 책의 작가와 한결 가까워진 것 같다고 했었다. 그리고 내 글의 첫 독자가 되어 주는 친구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기는 죽어도 수필은 못 쓰겠다고, 온 세상에 자신의 생각과 삶, 생활을 다 드러내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고 말이다.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극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시와 소설은 작가가 작품 뒤로 어느 정도 숨을 수 있지만, 수필은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장르이다. 수필은 작가 그 자신이어야 하며,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진솔하게 드러낼수록 가치 있는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나 역시 부모님과의 크고 작은 갈등을 어떻게 글에 녹여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었고, 특히 최근에는 엄마의 투병기를 어디까지 밝혀야 할지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환자였던 엄마에게 본인의 생각을 직접 물을 수 있다면 고민거리도 아니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필 쓰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세상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 또한 그래야만 하는 것. 나는 그것을 수필이 주는 힘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의 글에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으려면 항상 진실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필을 쓴다는 행위는 지독한 '초자아'를 늘 마음에 장착하고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수필은, 그리고 수필을 쓴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객관적인 눈으로 살피되, 스스로를 너무 억압해서도 해서도 안 되고 자신에게 지나친 관용을 베풀어도 안 되는 과정. 그것을 잘 겪어내고, 내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해 내어야 하나의 수필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최인호의 그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애써 다른 글감을 구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나 자신과 내 글의 독자들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 했던 것이니까. 대신 ‘요즘 이런 생각을 하며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을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이 수필의 정신에 맞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글을 써내게 될 것이고, 또 그러고 싶다. 나이가 들면서 쓰게 될 글에는 지금은 갖지 못한 여러 경험들과 깊은 생각들이 켜켜이 쌓여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아직 젊은 내'가 ‘연륜 있을 미래의 나’와 약속해두고 싶다. 글 앞에서 누구보다 솔직해질 것, 그리고 진실해질 것. 내 글을 훗날의 내가 다시 읽어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것. 그렇게 평생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리고 살아갈 수 있다면 수필과 함께 할 내 앞날도 참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