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가득히 죽은 닭의 머리가 클로즈업된다. 분홍색 피부와 붉은 벼슬, 뾰족한 부리.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큰 접시에는 닭 머리와 내장, 그리고 몸통과 다리가 함께 담겼다. 닭은 아직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아내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옆집에서 보내온 그 닭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아침까지도 살아있던 것이니 육회로 먹어도 괜찮을 거라던 이웃의 말도 함께 전했다. 남편은 아내의 그런 말을 들으며 죽은 닭의 눈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어느 것 하나 손상되지 않은 닭의 머리는 ‘고기’라기보다 ‘시체’의 느낌이다. 닭 머리를 바라보던 남자는 결국 그 끔찍한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만다.
일본 영화 “Good & bye”. 이 영화는 젊은 첼리스트가 우여곡절 끝에 장의사 일을 하게 되면서 겪는 어려움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다룬 작품이다. 사실 주인공은 죽은 지 2주일이 지난 시체를 염습하고 막 돌아온 터였다. 그런 그의 눈에는 오랜 시간 방치됐던 주검의 섬뜩한 모습이 죽은 닭 위로 겹쳐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시체의 물컹한 촉감과 썩은 송장 냄새도 느꼈을 것이다.
죽은 닭의 머리와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교차되는 영상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도시에서 자란 나는 토막 난 닭의 머리는 본 적이 없다. 포장되어 슈퍼마켓에 진열된 생닭은 몸통뿐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생닭은 단순한 ‘고기’ 일뿐이었지 그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닭에게 ‘머리’라는 것이 붙어 있었다니, 새삼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닭이 아침까지 살아있었다’는 아내의 대사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당을 자유롭게 돌아다녔을 생명을 저렇게 처참히 죽일 수도 있다니, 참으로 인간이 잔인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말에는 생닭의 살점이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온몸이 움찔거렸다. 스크린 속 죽은 닭의 눈을 보고 있으니 닭고기도 생선도 모두 먹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나는 생선과 고기를 좋아하니 그것들을 앞으로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결코 할 수가 없어 괴로웠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생선회를 먹으러 횟집에 간 적이 있다. 음식점의 넓은 수조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수조 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횟감과 생선 맛에 대해 설명하는 횟집 주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인의 말이 끝나자 부모님은 나에게 먹고 싶은 생선 한 마리를 고르라 했다. 나는 단맛이 난다는 크고 빨간 도미를 손으로 가리켰고, 그날 우리 가족은 도미 회를 맛있게 먹었다.
문제는 식사 후였다.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수조를 무심코 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까 내가 골랐던 큰 물고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물고기를 잡아먹은 것은 바로 나였으니까. 순간 도미 한 마리가 내 뱃속에서 파닥거리며 살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맛있게 회를 먹었을 때와 달리, 뱃속도 마음도 전혀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나는 회를 먹었고 고기도 즐기면서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그런데 영화의 저 장면 때문에 수족관을 유유히 헤엄치던 커다란 도미가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 도미가 과연 나를 위한 것이었던가. 동물의 알과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인간의 식욕을 위해 생겨난 것인가. 생선 알을 입에 넣는 것은 그 알이 부화하고 성어(成魚)가 되어 바닷속을 헤엄쳐 다닐 소중한 시간과 기회마저 없애는 것이다. 식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쌀도, 콩도 자기 자손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것이지, 사람에게 먹히기 위한 것은 애초에 아니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먹히고 마는 그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인공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장의사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주검을 다루는 그 일이 그에게는 정신적으로 너무나 고단했던 것이다. 그 뜻을 전하려 사장을 찾아간 날, 사장은 ‘복어 정자 주머니’를 숯불에 구워 주인공에게 대접한다. 그리고 그 별난 음식에 거북해하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동물은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을 먹어야 해. 그런데 미안하게도 다른 동물이 맛있단 말이야. 이왕이면 맛있는 것이 좋지.”
이 말을 듣자 나는 마치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수조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던 도미에 대한 미안함, 그러나 참으로 신선했던 도미회의 고소한 맛이 함께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장의사라고 해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제 아무리 성인(聖人)이라고 해도 생명을 음식으로 취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을 빼앗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영장(靈長)’으로 자처할 일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나를 살게 해 주고 소멸해 간 것들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의 일기장에나 등장할 당연한 말이지만, 진리란 사실 단순한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존재하게 한 모든 것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다.
첼로 음악이 극장을 가득 메운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조촐하게 준비한 파티에서 주인공이 첼로를 연주한다. 등장인물들은 테이블 가득 통닭을 올려놓고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 생닭을 보고 헛구역질을 해대던 주인공은 처음과는 달리, 이젠 게걸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통닭을 먹는다. 그 모습에서 나도 식욕이 느껴졌다. 역시 인간은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나 보다. 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도 통닭 한 마리를 사 가야겠다. 그리고 맛있게 통닭을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