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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pr 30. 2024

슬픔 그리고 은총

2024년 5월호 경향잡지 수록


집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을 확인하고 나니 며칠간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고독감이 몰려왔다. 쓰러질 듯 기운이 없었지만 남은 힘을 냈다. 아직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품에 안고 있던 엄마의 영정 사진은 안방 벽에 기대어 두고 전화기를 들었다. 장지(葬地)에 동행하지 못한 엄마의 지인들에게, 엄마를 잘 모셨고 장례식장에 와 주셔서 감사했다는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외동이고, 아버지는 며칠 전 받은 척추 수술 때문에 장례식장에도 오지 못한 채 입원 중이었다. 그러니 임종과 발인을 챙기고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까지 전부 내가 할 일이었다.


통화를 전부 마치자 집안 곳곳에 뿌연 먼지처럼 쌓인 적막이 보였다. 엄마가 아프기 전, 집에는 늘 엄마가 있었고 우리 가족은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 집은 세상 어느 곳보다 안락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혼자였고 10년 넘게 살아온 집은 참 낯설었다. 엄마의 물건은 그대로인데 그 주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입원실에 누운 아버지는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쓸쓸해하는, 죽은 이도, 우리 가족 모두가  외롭고 암담한 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엄마의 투병

엄마는 1년 반 동안 뇌종양을 앓았다. 큰 병 한 번 걸린 적 없이 예순을 맞이했던 엄마의 머릿속에는 인간의 몸에 생기는 암 중 악성도가 가장 높다는 ‘교모세포종’이 자리 잡았다. 개두술과 항암 치료도 받았지만, 상태는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아버지와 나는 엄마의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장례식은 성당에서 치르고 집안 납골묘에 엄마를 모시기로 이미 정해 두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척추 수술을 받은 지 사흘이 되던 날에 엄마가 돌아가시리라는 것, 그 때문에 나 혼자서 장례식을 치르리라는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아버지의 수술이 갑작스럽게 정해질 때만 해도 엄마가 한 달 정도만 버텨 주면, 그 사이에 아버지가 그럭저럭 몸을 회복한 후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은 맞이할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은커녕, 아버지가 입원한 날부터 엄마의 온몸은 기능을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항상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다

아버지가 수술받는 동안 나는 보호자로서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다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환자가 위독하니 빨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연락이었다. 나는 아버지 수술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가겠다고 했고, 이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를, 그리고 내가 도착할 때까지 엄마가 힘을 내주기를 기도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채 깨지도 않은 아버지께, 엄마의 의료진이 급히 보호자를 찾으니 그쪽 병원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알았다며 어서 가 보라고 했다.

엄마의 담당 의료진은 환자가 상당히 위독하니 병원 밖에 나가지 말고 엄마가 있는 중환자실 앞에서 계속 대기해 달라고 말했다. 사실상 환자의 임종을 기다리자는 뜻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장례 준비를 더는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면 아버지가 알려 주는 대로 일을 진행하면 됐을 텐데 아버지는 입원실 침대 밖도 나올 수 없는 환자였고, 나에게는 휴대폰과 혹시나 싶어 챙긴 엄마의 작은 사진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몇몇 친한 이들에게 상황을 전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담담하게 내 말을 듣고는 알겠다고 했다. 누구는 내가 갖고 있던 엄마의 사진을 받아 영정 사진을 만들어다 줬고, 누구는 내가 병원에서 지낼 수 있도록 세면도구와 음식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또 누구는 늦은 밤, 돌아가신 엄마를 병원에서 성당 장례식장으로 모실 때 동행해 줬다. 신기하게도 모든 순간에 누군가가 내 곁에 반드시 있었다.  

    

당신의 품에서 나를 돌보신 그분

조문객들에게 인사 전화를 다 마치니 비로소 며칠 간의 피곤이 밀려왔다. 상복을 벗지도 못한 채 방바닥에 우두커니 앉아, 지금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만 같다는 생각과 다행스럽게도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혼자 보낸 시간이지만 혼자 했던 일은 아니었다. 엄마와 주님께서 내내 나와 함께 하셨고, 나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 가장 도움이 될 사람들을 가장 필요할 때 내게 보내 주신 것이다.

방 안 공기는 마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을 때처럼 훈훈하고 포근하게 날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고생했다’, ‘잘 이겨냈다.’라는 말이 귓가에 울렸다. 집에는 나 혼자였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곁에서 날 지켜 주고 돌봐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물을 쏟으며 ‘고맙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를 보낸 밤, 고맙다는 기도가 입 밖으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다니. 세상의 눈으로는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 더 합당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은 당신의 품에서 나를 한없이 돌보셨던 그분께 대한 감사였다.

엄마를 잃었던, 그러나 엄마와 주님께서 내 곁에 함께하고 계심을 온 마음과 피부로 느꼈던 밤. 그 시간은 처연했지만 황홀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은총이었음을 깨달았던 그때, 빛 속에 싸여 계신 그분의 옆모습을 조금 뵌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향잡지 24년 5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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