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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Jul 04. 2024

전등사의 시시포스

이귀복의 수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불사가 끝나지 않은 대웅전 앞뜰에 연장을 던져놓고 퍼질러 앉아있는 그의 얼굴이 떨리고 있다. 분하고 괘씸하다. 그러기에 자신이 아랫마을 주막을 뻔질나게 드나들 때부터 계집은 믿는 게 아니라던 동료들의 귀띔을 새겨들었어야 했다. 피붙이 하나 없는 몸이 공사판으로 흘러들어 도목수가 되기까지 아는 것이라곤 오로지 집 짓는 일뿐인데, 어찌 계집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으랴. 외로운 남정네를 품어주던 그 웃음만으로 그저 사랑이라 여겼는데 날벼락도 유분수지 맡겨놓은 품삯까지 모조리 챙겨 들고 야반도주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하늘 아래 이런 괘씸한 계집을 보았나.


  전등사의 중건불사를 맡은 최고의 기술자 도편수. 자신을 배반하고 달아난 계집에 대한분노로 온몸이 타들어가고 있다. 이런 마음을 숨긴 채 신성한 불사를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쳐가는 사내를 곁에서 바라보는 스님의 억장도 함께 무너진다. 그렇다고 마무리만 남은 이 불사를 지금에 와서 누구 손에 맡기겠나.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그의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손끝 야물고 성실했던 그가 그리도 쉽게 계집의 꾐에 넘어갔는지 사내의 어리석음에 기가 막히는 건 스님이라고 다르지 않다.


  계집에게 돈을 뺏겼으면 마음이라도 잡고 있던지, 마음을 주었으면 돈일랑은 부처님 복장에라도 숨겨놓았어야지, 우직한 도편수로 살아온 사십 년을 몽땅 도둑맞았구나. 부처님 집을 짓고 살아온 사내라 보통 중생과는 다를 줄 알았더니 어리석긴 더하였구나. 혀를 차며 돌아서는 스님의 장삼자락에 천근의 번뇌가 내려앉는다.

  추위가 오려는지 대웅전 뜰에 풋눈이 분분하다. 사내의 뺨에 들러붙는 시린 눈발의 감촉. 사내가 소스라친다. 살갗의 기억은 어제인양 또렷하다. 돈을 맡기던 날 밤, 계집이 퍼붓던 뜨거운 입술의 촉감이 이 눈발 어디에 숨어있었던가. 뺨이 화끈하다.


그래, 얼음이 불이었고 사랑이 증오였구나. 이제 그 못된 계집의 형상을 빚으리라. 지분냄새 향기로 사내를 호려 재물을 빼돌린 야차 같은 년, 인간의 신뢰를 저버린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빚어 세세만년 벌하리라.


  목재더미로 향하는 사내의 얼굴이 굳어있다. 못난 통나무 하나를 골라내어 눈발을 털어낸다. 그는 이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정면대결하려는 것이다. 통나무 허리에 톱날을 올려놓은 사내의 눈빛에 광기가 번득인다. 삽시간에 네 개의 나무토막이 법당 앞에 널브러진다. 시신을 잃어버린 수급首級이 따로 없다. 낭자한 선혈. 대웅전 앞마당에 시퍼런 살기가 돈다. 사내를 가엾게 여기던 부처님조차 민망한지 고개를 돌린다. 잘린 나무토막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어린다. 그렇다. 지난 시간을 제대로 도려내기 위해선 그 기억을 일부러 피해서는 안 된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통으로 힘든 사내가 눈을 감는다.


  여인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운다. 배꽃 사이로 달이 지던 어느 봄밤, 여인과 나누던 술잔에선 꽃향기가 났었지. 그뿐인가, 소나기 같은 열정으로 여인을 안던 원두막에서의 여름밤과 불사가 끝나면 함께 살림을 차리자던 여인의 맹세는 어디로 흘러갔는가. 사내가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모든 건 헛것이었고 남은 건 분노뿐,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계집을 향한 분노는 떨쳐내어야 한다. 뱀처럼 감겨드는 고통의 시간은 도려내야 한다.


  식음도 폐한 몇 날 며칠을 사내는 나무만 주무르고 있다. 네 개의 토막으로 십이지신상을 빚을 리도 없고, 끌로 파내고 다듬는 양으로 보아 무슨 동물을 조각하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사내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스러워 스님도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볼 뿐이다. 앞산 잡목들이 잔설을 털어내는 봄.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기이한 형상 앞에 사내가 앉아있다. 분노로 타들어가던 그의 얼굴이 많이 야위어있다. 날이 풀리길 기다린 단청장이 대들보에 단청을 입히는 걸 보니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사내가 단청장을 부른다. 비로소 사내의 목소리에서 도편수의 권위가 느껴진다.


“이것에 단청을 입히시오. 온몸은 붉게, 그리고 두 눈은 푸르게 칠해 주시오.”


사내가 빚어놓은 네 개의 형상. 어떤 것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또 다른 것은 왼손을 들었다. 짐승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괴물을 본 단청장의 얼굴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연신 고개만 갸웃거리는 단청장 옆에서 스님이 비로소 입을 연다.


  “대체 무슨 동물의 형상이기에 이다지도 흉물스럽단 말이오? 혹시 그대가 절집을 수호한다는 원숭이를 잘못 빚은 게 아니오?” 

사내의 얼굴이 지옥처럼 어둡다.


  “스님, 신뢰를 저버리고 달아난 주막집 계집의 형상입니다. 부디 이 계집으로 하여 이 절집의 대들보를 받치도록 해 주십시오.” 

스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황망하기 그지없다.


겨우내 돌아앉아 빚어낸 것이 다름 아닌 네 가슴속의 원한덩어리였구나. 나는 그대가 여인을 잊어버리길 날마다 부처님께 발원하였건만 용서란 결국 시간이 필요한 것을. 그대의 마음이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가능한 일임을 나도 이제야 알겠네. 그러나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스님, 이번엔 사내를 넌지시 달래어 본다.


“그대는 분노를 엉뚱한 곳에 풀지 않고 이 나무토막으로 삭히는 법을 알았으니 이미 분노로부터 해방된 것이오. 그래도 이 여인을 처마 밑에 꼭 매달아야 하겠소?”


  “예, 악연이 반복되더라도 저는 이 계집을 꼭 대들보에 매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부처님조차 그대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


  외골수의 사내가 딱하기만 하다. 분노인가 집착인가. 스님도 가늠이 어렵다.  사내가 사다리에 올라 기어이 계집을 끌어올리고 있다. 죄지은 계집은 꼼짝없이 처마 끝에 쭈그리고 앉아 지은 죗값을 치르기 시작한다. 전등사의 대들보, 그건 온전히 발가벗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대들보가 무겁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거니와 죄인인 주제에 그 대들보에 목매달아 죽을 자유는 더더욱 없다. 죽음보다 무서운 권태. 여인이 그대로 시시포스인 것을.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여인의 탐욕도 사내의 분노도 모두 우리들 모습이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고 사랑은 이별로 완성되는 법, 우매한 사내가 감히 그걸 짐작이라도 했을까. 그러나 그 사내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감정에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의 분노를 분노 그대로 인정한 스님, 그는 끝내 이 말을 참았는지도 모르겠다.


“전등사에 나부상이 존재하는 한, 도편수는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설명 (12.03.02)


오 년 전 강화도 전등사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전설로만 알고 있던 나부상의 현장을 보고 강한 끌림을 느꼈어요. 절 앞 기념품가게에서 나부상모양의 열쇠고리를 구입하여 그동안 손때가 묻도록 들고 다니면서 작품을 구상했지만 수필의 정석이라는 1인칭의 서술로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의 재미를 형상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여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필에서 3인칭을 사용하면 작가가 아닌 제삼자가 서술하는 형태가 되므로 대상과의 거리가 멀어져서 사실성이 약화됨은 물론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받게 한다.”라는 일반적인 주장에는 위배가 된 셈이지요.

그러나 작가가 직접 겪은 사실이나 체험이 아닌, 전설이나 설화 등의 내용을 다룰 때는 3인칭의 수법도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글의 주제는, 주모를 향한 도편수의 증오의 밑바닥은 결국 ‘사랑’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한편 주모뿐 아니라, 증오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편수 역시 ‘시시포스’였다고 갈파한 예리한 독자도 있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이상이 제가 <전등사의 시시포스>를 쓰게 된 동기와 배경입니다. 선생님들, 부족한 글에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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