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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Jul 23. 2024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경향잡지 <나의 삶 나의 신앙> 8월호 수록

겁이 많은 내가 일본 유학을 결심한 데는 하느님께서도 한몫하셨다. 어디에 있든 항상 돌봐주시겠거니 하는 단정한 믿음보다는 투정 부리는 어리광이 당시 내 가슴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세계 보편 종교이니 일본에서도 미사 참례가 가능하리라 생각했고, 그것은 낯선 도전을 앞둔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입학과 학교 기숙사 입소일이 정해지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숙사 주변의 성당을 구글 맵으로 열심히 검색하는 것이었다.




<도쿄 세타가야성당>

내가 머물 기숙사 근처에는 두 곳의 성당이 있었다. 한 곳은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Piarists) 경당으로 서양인들이 주로 다니는 듯했고, 다른 한 곳은 일본 현지인들이 다니는 도쿄세타가야 성당이었다. 일본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왕이면 현지 성당의 분위기를 알고 싶은 마음에 세타가야성당을 다니기로 했다.

한국에서 다니던 화려한 신도시 성당에 비하면 세타가야성당의 건물은 무척 작았다. 목조 건물이었던 성당의 바닥은 삐걱거리며 외지인의 발걸음을 반겼고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내부에 가득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신선했다.

그곳의 미사 풍경은 내가 알던 것과 약간 달랐다. 사도신경을 욀 때에는 신부님이 제대 아래로 내려와 십자가를 향하셨고 전례 봉사자들은 전례복을 덧입지 않은 사복 모습 그대로였다. 옆자리에 앉은 신자에게 일본 성당에 처음 온 한국인 유학생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수녀님을 소개해 주셨다. 수녀님은 베일을 쓰지 않은 커트 머리에 사복 차림이었고 목에 걸린 커다란 십자가가 수도자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표시였다. 이것들이 세타가야성당만의 특징인지 일본 교회 전체의 특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차이점에도 미사의 근본적인 구성과 전례력에 맞춰진 신부님의 제의 색, 그리고 그날 미사의 독서와 복음 내용이 한국과 똑같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는 감동이었다. 예비신자 교리 시간에 배웠던 ‘보편성’이란 말이 새삼 떠올랐고 내가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한국에서 성당을 다닐 때는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세타가야성당에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신자들이 많았는데, 성체를 모시려고 제단을 향해 줄을 서면 키 작은 일본 할머니들의 회색 머리가 내 얼굴 아래로 나지막하게 보였다. 길이가 1미터는 될 법한 커다란 성지(聖枝)와 부활 미사 후 성당 뒷마당에서 신자들이 준비한 음식으로 열었던 소박한 파티. 그리고 성당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같은 한국인 선배는 유학 생활의 불안함과 고단함을 다독여 주시고자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였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았던 일본의 성당들>

나는 유학을 마친 후에도 휴식을 위해서나 일본인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변 성당에서 꼭 미사를 보았다. 각 성당의 풍경은 내가 다녔던 세타가야성당 혹은 한국의 성당과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했다.

오사카의 성마리아성당에는 일본에 처음으로 가톨릭을 전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유스토 다카야마 우콘 복자의 석상이 있었고, 도쿄 조치대학교의 성이냐시오성당에는 연꽃을 닮은 커다란 조형물이 천장을 아름답게 채우고 있었다. 교토 가와라마치성당에는 ‘미야코의 성모상’이, 히로시마에는 세계의 평화를 기리며 지어졌다는 세계평화기념성당이 있었다. 그리고 고베의 중앙성당에는 제대 위 예수님 상 옆으로 스테인드글라스의 은은한 빛이 따뜻하게 번지고 있었다.

내가 갔던 일본의 성당들은 낯선 곳이었지만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나를 보살피는 아버지의 집이었고, 그래서 나의 집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자취 생활을 했던 유학 시절에도,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여행 중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성당이 있었고 그곳은 나의 안식처가 되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타가야성당에는 아기 천사 얼굴과 함께 그리스어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새겨진 조각이 있다. 나는 부끄럽게도 유학 생활 중에야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의 의미를 제대로 묵상하게 된 것 같다. 인간을 사랑하여 희생을 선택하셨다는 그분의 이야기 앞에서, 유학을 앞두고 느꼈던 불안을 그분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셨는지 일본에서 지내며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성당까지 지름길을 찾기 위해 수없이 걸었던 도쿄의 골목길들. 주일 아침이면 기쁜 마음으로 향했던 성당 가는 길. 낯설었던 일본어 기도문이 어느 순간 귀에 들어오고 성가책 없이도 일본 성가 멜로디를 따라갈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기쁨. 일본인 신부님의 강론이 우리나라 신부님들이 해 주셨던 말씀과 일맥상통함을 느꼈을 때의 감동. 모두 내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맛볼 수 있었던 특별한 행복이자 은총이었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여러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걱정과 두려움에 몸과 마음을 웅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학을 앞두었을 때 어리광 가득한 마음을 하느님께 보여 드렸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분의 사랑과 위로가 필요할 때면 여지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아마도 그분은 따스하게 나를 안아 주시며 “나의 귀염둥이 …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준다(「공동번역 성서」, 이사 43,4-5).”며 말을 건네실 테지. 그러면 그분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한 발을 내디딜 것이다. 그분의 위로에 용기를 내어 떠났던 유학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내 삶을 돌아볼 먼 훗날, 모든 순간에 그분이 계셨음을,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그분과 함께했던 추억이 무엇보다도 향기롭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기를 꿈꾼다.




경향잡지 24년 8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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