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나 Nov 16. 2020

가난이라는 경험

“자기는 나보다 10년쯤 먼저 산 사람 같은 느낌이야.”

나와 동갑인 남편에게 꽤 나 자주 듣는 말이다.

내 부모는 가난했다.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곳에서도 가난으로 Top을 찍었을 정도이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점을 했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비나 눈이 많이 오면 벌이가 없어 매일매일 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했다.

   

우리 동네에는 집에 화장실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시장 한켠에 유료 공동화장실이 있었고, 대변은 50원, 소변은 20원을 내고 일을 봐야 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정말로 큰일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작은 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떻게 해결했느냐 묻지 마세요. 죄송하니까요.)

그래도 참 신기한 게 다들 그렇게 살면서도 웃을 일도 많았고, 서로서로 돕고 살았던 기억뿐이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추억해보면 가장 이해하기 힘들지만 제일 그리운 부분이다.     


초등학교는 얼마 안 되는 육성회비라 큰 타격이 없었지만, 중학교는 수업료를 못 내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문제는 오빠와 내가 두 살 터울이라 중학생이 2명인 상황이다 보니, 두 사람 모두 반년치 수업료가 밀려있는데 한 사람의 1분기 수업료만 납부가 가능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당시 성격이 밝고 활발한 나였지만, 수업료 미납으로 교무실에 정기적으로 불려 가는 상황이었고, 교내방송으로 수업료 미납자들을 방송하면 창피함에 화장실로 숨어버리는 사춘기 소녀였던지라 그 1분기 수업료를 오빠한테 양보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오빠가 그걸 나한테 양보했을 때 “아냐, 오빠가 더 많이 밀려있을 텐데 이번에는 오빠가 내”라는 말은 목구멍 저 안쪽으로 꿀꺽 삼켜져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게 30년이 지난 지금도 오빠에게 참 미안하다.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만나는 여고 동창 희주라는 친구가 있다.

희주 눈에 내가 자꾸 들어왔다고 한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나에게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 이후 친해져서 희주를 우리 집에 몇 번 데리고 와서 라면도 끓여 먹고 방바닥을 뒹굴며 수다도 떨고 복근이 생길 만큼 깔깔거리며 웃었던 추억이 있다.

졸업 후 10년쯤 지나 술 한잔하며 나에게 어렵게 건네는 얘기가

“나 사실, 너희 집 처음 갔을 때 많이 놀랐었어.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같이 사는 그런 집을 직접 본 적은 없었거든.

내심 많이 놀랐어. 근데, 너네 집에 다녀온 이후로 니가 더 좋아지더라.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인데도 너는 밝고, 니네 식구들 다 재미있고 따뜻해서 신기하면서도 좋았어.”

이 말에 나는

“야! 이년아,
그때 니가 본 그 집이 이제 친구를 집에 데려와도 되겠다...
싶은 그런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간 거라
너를 우리 집에 데려간 거야.
그 전에는 진짜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었다.
너 그전에 살던 집 갔으면 울었어.
깔깔깔”     


가난은 많이 부끄러웠고, 불편했고, 많은 눈치를 보게 했다.

그러나 어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열심히 살았지만, 경제적 상황은 나아지는 게 없었다.

희망이라는 말은 떠올려 본 적도 없는 생소한 단어였던 듯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노점에서 연탄장사로 그러다 작은 분식집을 차리면서 적은 돈이지만 매일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월급을 받기 시작했고,

돈 들어갈 일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아빠는 은행을 드나들기 시작하셨다.

매일 은행 문을 여는 9시가 되면 1번 방문자는 항상 우리 아빠였다.

누가 보면 빌딩 몇 채 가지고 있는 알부자로 알겠다고 놀리기도 했을 정도다.

나이 오십이 돼서야 통장을 만들고, 예금을 들고 하는 재테크에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온 식구가 열심히 벌고 모으던 중 IMF 가 터졌다.

나라 전체가 어려운 시기였지만, 아빠는 현금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다니던 직장도 큰 타격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경매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집 사는 걸 서둘렀던 이유는 또 있다.

사실, 모아놓은 돈이 집을 살만큼 넉넉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빠는 내가 시집가기 전에 일 년이라도 ‘내 방’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이 싼 동네에 복층으로 된 주택을 경매로 샀다.

결국 내 나이 26살에 단칸방을 벗어났고, 2층 제일 큰방이 내 방이 되었다.

그래도 내 방에서 2년이나 살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하고 금방 생길 줄 알았던 아기가 생기지 않아 불임으로 고통받던 어느 날,

아빠랑 엄마는 우울해하는 나를 불러내서 밥을 먹고 목적지 없이 드라이브를 갔다.

순간 울컥하고 드는 생각이...

“크게 돈 걱정 안 하고, 연탄불 신경 쓰지 않아도 아무 때나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 부모님 집이 있고, 이렇게 마음대로 드라이브를 할 수 있는 차도 한 대 있고, 나도 내 집과 차가 있는 이런 날이 나에게도 올 거라고 기대도 못하고 살았는데... 징징거리지 않고 남 탓하지 않고 어찌어찌 살다 보니 참 잘 살고 있네”

갑작스러운 현실 자각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큰 선물을 받아놓고도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고 있었달까?  

   

몇 년 전 희주네 부부와 처음으로 골프장에 간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치스러운 운동이라는 생각에 배울 생각도 없었는데, 친구들과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골프를 배우고 머리를 올리러 골프장에 간 날,

잔디를 밟는 순간 갑자기 울컥! 하고 감정이 올라오고, 눈물이 차오른다.

나조차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동생에게 그 감정에 대해 얘기했더니, “언니,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몇 년 후 동생 머리를 올려주러 갔는데 동생이

“언니, 언니가 울컥했다는 그 당황스러움. 내가 지금 그래. 깔깔깔”     


살면서 가끔은 ‘가난했던 경험치가 있어 나쁘지만은 않다.’ 싶기도 하다.

언제 나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에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마는

혹시라도 온다면 잘 겪어주마.

그때 그런 상황도 살아냈는데 어떤 상황인들 못 견뎌 내겠나.

내 식구 몸만 건강하면 돈은 어떻게든 다시 벌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다.


요즘 사업을 하는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다.

전 세계가 다 어려운 상황이라 못 벌어 오는 걸 남편만 탓할 수는 없지 않나.

그에게 징징거린다고 한들 상황이 나아질까? 씀씀이를 줄이는 수밖에.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얘기한다.

“지금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는 않아. 너희들 걱정하거나 불안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고,  

가족이니까 상황을 공유해야 할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거야.

오늘부터 엄마는 긴축재정에 돌입한다. 오해하지 말고 협조해라.”


이렇게 견디다 보면 또 살만한 날이 온다.

오래는 아니지만 한 50년 가까이 살다 보니

다 좋은 것도 없고, 다 나쁜 것도 없다.

나쁜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오더라.

내가 이렇게 걱정 없이 살아서 살이 찌나? 싶은 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