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예민한 장이 이제는 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습니다.
지인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장트러블러예요.
고속버스는 아예 이용할 생각도 못하고, 부득이하게 타야 하는 경우에는 2 끼니 정도는 금식합니다.
제 친구들이랑 식구들은 그걸 똥병이라고 부르는데,
오래돼서 그런지 배가 아프면 화장실을 정말 잘 찾아요.
친구와 괌에 갔을 때 친구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오전 시간이라 길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건물도 별로 없고, 말도 안 통하고... 진짜 총체적 난국에 비상사태!
저는 그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온 신경을 화장실 찾기에 집중합니다.
결국 어느 마트 물류창고의 직원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일로 친구는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고 지금도 얘기하죠.
뭐, 화장실 에피소드야 차고 넘치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을 적어볼까 해요.
전에 쓴 글에도 있지만, 저는 불임센터에 다니다 3년 만에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요.
임신되는 게 어려웠지 임신이 되고 나서는 입덧도 없고, 예정일 5일 전까지 회사에 다니는데도
큰 불편함 없이 다녔어요.
배는 4개월 때부터 남들 6,7개월은 되는 정도로 크게 불러왔었고요.
그날도 여직원들과 맘껏 먹고 헤어져서 집으로 오는 길이였어요.
회사는 삼성동이고 저는 잠실까지 와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중간에 소식이 옵니다.
화장실 가고 싶어서 급하게 종합운동장역에서 내렸어요.
아.뿔.싸
그날 야구경기가 있었나 봐요.
모두들 그 응원봉을 하나씩 들고 줄을 길~게 서 있는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안 나고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감만 가득 차 있었어요.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한 아가씨가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봐 주시는 거예요.
아차! 나 만삭 임산부였지?
"(떨리는 목소리로) 저 죄송하지만, 제가 급해서 그런데 화장실을 먼저 좀 이용할 수 있을까요?"
그때 사람들이 쫘악~ 하고 비켜주시는데, 그때의 감사함이란...
119 불러드릴까요?라는 소리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들어갔죠.
비켜주신 분들은 제가 진통이 시작된 거로 오해하신 듯해요.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맘이 다르다더니, 진짜 나올 때 부끄러움이라는 관문이 남아있었어요.
어쩌겠습니까?
"(바삐 문을 열며) 감사합니다." 소리치고 도망치듯 나왔어요.
임신기간 내내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도 자리양보 한번 못 받았던 서러움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세상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진짜 임신 3개월 때는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빨갱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었거든요.
벌써 16년 전 일이라 그때는 임산부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2년 전쯤 지하철에서 앞에 앉은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주는데,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3초 뒤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끝났지만 양보해준 자리에 앉기도 뭐하고
거절하기도 뭐하고 참 난감하더군요.
그냥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임산부처럼 앉아서 왔습니다.
그런 오해를 받고도 출출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저는 문제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