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해주려다가

내가 위로받았네

by moonbow

20대 후반의 일이다.

우리 오누이는 어렸을 때부터 여느 오누이가 그랬듯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래도 주변에 얘기하면 친한 편이라고 한다. 아예 말조차 나누지 않는 오누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둘 다 취업 준비생과 공무원 준비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때 유독 오빠가 보기에 내가 힘이 없어 보였나보다. 아마도 우울증의 증상이 진행 중이었던 것 같다. 명절이라 집에 내려가 무언의 압박을 견디며 밤에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오빠가 날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고 평소처럼 자기를 놀려야 되는데 자기를 놀리지 않으니 좀 걱정된다고 용기가 날만한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보여준 것은



IMG_5677.JPG 쵸파


원피스라는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쵸파의 에피소드였다.


해적이 되려는 고무인간 주인공과 친구들은 쵸파를 처음만나게 되고 그의 극단적인 성격과 귀여움, 그리고 의사로써의 실력을 알게 된다. 원피스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오빠가 쵸파의 이야기를 보여준 덕에 저렇게 귀여운 쵸파가 겪은 시련, 그리고 인간도 동물도 아니었기때문에 겪었던 소외감. 하지만 그걸 모두 이겨내고 저렇게 다부진 표정으로 의사가 되었다며 울먹이면서 애니매이션을 보여주는 도중에도 굳이 설명을 해가며 강조하였다.


귀여운 캐릭터가 저런 이야기까지 가지고 있다니 지나쳐가며 보던 이 캐릭터가 인기있는 이유가 있구나 생각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도라에몽과 보노보노를 헷갈려하고 피카츄가 나중에야 쥐라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귀엽지 않고 무섭게 느껴졌다.(쥐 혐오증이 있다.)


우울한 나는 오빠의 열혈 쵸파 사랑과 나에게 전달해주려는 위로를 알아듣긴 했지만 그렇게 극적으로 위로 받아 힘을 내서 쵸파처럼 바로 귀엽고 힘이 생기진 모했다.

그리고 계절이 두 번이 바뀌었다. 우연히 인사동에 일이 있어 걸어가다가 계약을 하거나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할 때 사용하자며 도장을 만들었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열쇠고리를 보았다. 오빠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귀여운 쵸파 열쇠고리를 샀다. 그 날은 살아가기 위해 구매하는 목록 외의 것들에 돈을 썼다. 하지만 마음이 버티는 데에는 오랫동안 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오빠에게 쵸파 열쇠 고리를 전해주려고 여러번 시도했지만(솔직히 몇 번) 계속 까먹어서 내가 열쇠에 걸고 있다가 오빠에게 주려고 했다. 결국은 쵸파 열쇠고리는 내가 걸고 다니게 되었고 선물로 주기에는 조금 쵸파가 세상 물을 너무 많이 먹게 되었다.


쵸파와 나는 집을 나갈 때는 항상 같이 나갔고 열쇠가 필요없는 경우에도 계속 가방이나 책상에 있었다. 어느 날 책상 앞에 쵸파를 세워 놓고 업무를 보는데 직장동료가 나랑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런가....... 한 참을 멍하니 있다가 그런 캐릭터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가지고 있다는 말에 어떻게 이 쵸파 열쇠고리를 내가 가지고 다녔는 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은 누군가를 위로하려던 건데.........

누군가를 위해 위로하려는 말은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위로하려는 말에 더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들, 마음들.


누군가를 위로하려다

결국 내가 위로받았다.


쵸파처럼 극단적 성격(화가 나면 헐크처럼 되고 귀엽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부끄러워하며 머리만 숨기지만 사람을 고치는)이라도 그래, 저 눈빛과 귀여움이라면 누구든 힘과 위로가 되고도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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