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하고 싶다
3-마리의 밤
응…음….응…으로 이어지는 대답이 주를 이룬 짧지 않은 통화를 끝내자 온 몸을 두드려 맞은 듯했다. 맨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어찌됐든 이 반 지하를 나가자고 생각했다. 어둠이 서서히 사물들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둠이 스미는 시간에 맞춰 도시도 불을 하나하나 켜고 있었다. 그래도 이러면 세상이 조금은 어둠에 가려져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아직은 싸늘한 느낌의 바람. 하지만 겨울의 가장 차가운 지점을 지났다고 위안을 주듯 그 바람 속에서도 먼 계절이 다가옴을 느꼈다. 내일이란 미래도 생각할 수 가 없었다. 그저 난 내 감각을 마비시키고 쉰내 나는 좌절을 안고 사는 것이다. 강변북로에 길게 이어진 차들을 본다. 그 위로 길게 흘러가는 도시의 강. 그 물결 위로 가로수가 둥둥둥 떠 있다. 그리고 강 건너 보이는 수많은 아파트의 창문들. 그 창문들은 더는 너에겐 빈 공간을 없다는 듯 촘촘히 불을 켜고 있다. 그래 이 도시는 항상 촘촘했어. 내게 점 하나의 공간조차 내어 주지 않았지.
나를 마비시킨 것은 무엇 인가.
12년의 정규교육 과정과 4년의 대학.
그리고 비로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그 무엇을 해도 좋아 보이는, 그래 솔직해 지자 부러워할 할만한 삶을 쥐어 잡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나는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해 잘 곳을 찾는 외계인처럼 산책로를 걷는다.
나는 마비에 중독된 것 같다. 어느 순간 없어졌다고 해도 오른쪽 발의 얼룩이 어느 순간에는 턱밑까지 스며들어 있다. 구정물처럼 습하고 흙 냄새가 난다. 아무리 햇볕을 쪼여도 그 구정물은 증발하지 않는다. 팔 다리를 축 늘어뜨린다.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벤치에 앉아 강 건너를 무심히 바라본다. 비릿한 물 냄새가 전해 온다. 싸늘한 바람이 볼을 스친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진다. 강물에 비친 그 너울거리는 어둠이 흐리고 흘러 마음 깊은 곳까지 도달해 옴을 느낀다. 작은 숨이 새어 나온다. 결국 그래도 몇 달 치 월세가 밀리긴 했어도, 천 만원이 넘는 학자금 상환금이 연체됐다는 통보서가 있지만 따뜻한 보온밥통엔 조금 누런 밥이 있는 지하의 방이 있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발길을 돌린다.
돌아오는 길. 그림자가 길다. 츄리닝을 입은 남자가 담배를 물고 뛰듯이 걸음을 재촉한다. 길 고양이가 나를 경계하며 쓰레기 봉투 옆을 지나간다. 집들 사이에선 희미한 밤의 온기가 나오는 것도 같다.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고양이는 아니다. 낮게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쥐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반지하는 사각지대가 생긴다. 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아래 부분은 작은 공간이 생기고 집주인은 이곳에 쓸모 없는 잡동사니를 두는 공간감을 발휘한다. 그 어두운 잡동사니 공간에 작은 검은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아마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미루어 보아 유기견 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무심히 집에 들어와 밥통을 열어 밥을 푼다. 싱크대에 밥그릇을 올려놓고 찬장을 열어 간장을 꺼낸다. 그리고 그 뒤에 참치 캔을 봤다. 사 놓아 두었는지도 잊어버린 참치 캔이다. 아마도 폴 오스터 소설처럼 막막한 순간에 무엇인가 나타나 주인공을 끄집어 올려 주는 '우연' 같은 그런 참치 캔이다. 주저 없이 캔을 뜯는다. 밥 위에 올리고 간장대신 고추장을 찾기 위해 냉장고문을 연다.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빈다. 감각이 마비되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나 보다. 입안에 군침이 돈다. 그리고 군침이 도는 자신을 느끼는 그 순간을 저주한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먹는 곳에 집중한다. 그래도 이 밥을 먹고 신경을 본능 안에 머물게 둘 때는 그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다. 빈 그릇을 씻고 나니 남은 참치가 보인다. 다음 끼니에 먹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다. 하지만 밖에 보인 검은 그림자가 머리를 스친다.
참치 캔을 두러 나가 검은 그림자가 숨어 있는 구멍을 바라보자, 낮게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덥수룩한 검은 털이 보인다. 조금 멀찌감치 참치 캔을 두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벽에 누워 집안의 침묵을 옆 집의 낮은 목소리들을 그리고 TV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더는 이 침묵의 시간 속에 자신을 대면하기가 겁난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는다. 수많은 화면 속에는 울고 웃는 사람들, 과장된 웃음 소리, 저 멀리 이름도 생소한 여행지,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 그리고 매일 같아 보이는 뉴스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자정이 넘고 모든 신경이 잠잠 해졌다는 듯 기지개를 폈다. 문을 열어 참치 캔을 확인해보았다. 참치 캔은 잘 씻고 마른 행주로 잘 닦아 말린 식기처럼 깨끗하다. 캔을 분리수거 함에 놓고 들어왔다. 그리고 깊은 어둠을 덮고 다시 깨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밀치는데 나도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바로 그 알 수 없는 뒤와 반대 방향으로 가해지는 힘 때문에 나는 무척 두려웠다. 두려워서 숨을 곳을 찾고 싶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 깊은 어둠에서는 눈이 필요가 없어 퇴화된다고 하는데 작은 빛 줄기 하나가 너의 그 숭고한 퇴화를 하찮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넌 그 빛 줄기를 보고 싶은 것이냐? 물고기는 어둠이 뭔 줄 몰랐다. 자신은 어떤 생물도 경험한 적 없는 어둠 속에 있었으면서. 어떤 모험가도 눈 없는 물고기가 산다는 그 동굴 속을 탐험할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한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3년에서 5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누구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어둠과 고독을 느낄 것이다. 영겁이 흘러도 그 검은 고독을 감내할 용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작은 빛 한 조각이 그 동굴의 환경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검다고 할 수도 없는 색깔없는 어둠이 만든 세계는 빛의 파편으로 변화하고 변태할 것이므로.
눈 없는 물고기야. 너는 어둠을 모르겠지. 넌 그 깊은 색깔도 없는 어둠 속에 잠수하고 있으면서. 넌 빛이라는 것을 아니, 그 한 파편을 알고 나면 넌 있지도 않은 눈으로 눈물을 떨구려 할 지도 몰라. 아니, 눈이 없어 울 수 없는 넌 온 몸의 비늘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울어버릴 거야. 아마도 그런 고통 그건 네게 희망일까, 고통일까 네가 사는 그 깊은 동굴 밖, 아주 아주 넓은 바다에는 폐를 가진 물고기도 살고, 때로는 수면 위로 올라와 인간세계와도 만나는 수많은 물고기가 있단다. 난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넌 아마 많은 이야기들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경험하고 싶을지 몰라. 허나, 그것은 희망일까, 사랑일까,절망일까
희망과 사랑만이 우리를 철저하게, 처절하게 고독하게 한다. 그리고 진짜 사랑만이 우릴 변형시키고, 또 밑바닥까지 정직하게 절망시킨다. 그 빛 한 부스러기가 너의 숭고한 퇴화를 정직하고도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퇴화를 하찮게 만들어 버릴 수 있어. 그 빛이 너의 비늘과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안구의 세포를 폭발시킬지 몰라. 그래도 넌 선택하겠니? 빛 한 조각을! 빛의 파편을, 빛의 부스러기를. 축복이자 저주가 될 '치명적 하늘 한 조각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보는 이를 보면서 외면당했다고 괜한 처절함을 느낀다. 아니다, 가장 큰 처절함은 우리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눈이 떠졌다. 새벽 4시 30분 즈음이다. 잠을 잔지 3시간. 이제 잠으로 부터도 밀려나고 있는걸까. 오래된 노트를 펴니 어떤 책인지, 어떤 작가인지 모를 글이 베껴져 있다. 한 때는 필사를 했었다. 필사를 하는 순간에도 마음이 불안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어느 밤의 한 조각, 그 글들을 붙잡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본다. 작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설마, 내가 쓴 글은 결단코 아니다. 다시 한번 노트의 글자들을 본다. 글씨체를 보니 불안이 흐트러져 있다.
'아침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잖아.'
노트를 집어 던진다. 그런 흔한 말들을 집어치워!!! 울 수가 없다.
마른 눈물. 아이러니. 아니면 모순. 아니면 말이 안되지만 말이 되는 말.
말이 안되지만 말이 되는 말. 마리. 나.
증발하고 싶다!
다음 편 부터 좀 더 밝은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