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엘마리 8,9

by moonbow

한 마리는 집으로 걸어갔다.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오늘은 매니저가 이것저것 시키는 일이 많아서 더 늦어졌다. 가불을 받았다고 일을 더 시키는 걸 수도 있었다. 행동 하나 하나에 잔소리를 하는 통에 더 정신이 없었다.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마리에게 설거지를 하라고 했다.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마리가 자꾸 실패하는 거품을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옆에서 하도 떠들어 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왜 이리도 먼지 알 수가 없었다. 거의 집 앞에 왔을 때 집 앞에 욱이 있었다. 한 마리는 등골이 서늘했다.

이 시간에 집 앞에 있다니.

무슨 일이 있거나 자기한테 화가 많이 났거나 두 가지였다.

“어이, 어이. 이제 오냐? 왜 그렇게 싸돌아다녀?”

“일하고 오는 거야.”

“얼~ 취업했나봐. 그래도 명문대 출신이잖아.”

“명문대는 무슨. 술 마셨어?”

“나 밥 좀 해줘.”

“나 너무 너무 힘들어.”

“이젠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전화도 안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맨날 전화하더니.”

“네가 하면 되잖아.”

“뭐라고? 많이 컸다. 한 마리.”

‘헤어지고 싶다.’ 마리는 생각했다.

욱은 마리의 남자친구였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마리는 어쩌다 알게 된 이 남자에게 급속도로 빠졌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삼류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 두고 연기를 한다, 음악을 한다며 그저 마리의 애정을 이용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리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있어 판단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가진 어쩔 수 없는 아픔과 답답함. 지금 그를 밀쳐낸다면 너무 그에게 가혹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마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뱀파이어와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 무슨 일을 하는데 이렇게 늦게 들어 오냐고? 대답 안 해?”

욱은 마리의 팔을 세게 잡았다. 그리곤 마리를 끌고 마리의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마리는 온 몸이 쑤실 듯이 아팠다. 머리는 지끈지끈했고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따 저녁에 카페는 꼭 가야만 했다. 가불을 받은 상황이니. 하지만 사무실은 무슨 일이 있거나(학업, 면접 등) 하면 자유롭게 조정가능하다는 조건으로 들어간 것이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치 일당이 깎인다고 생각하니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관리자인 철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마리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9화 마리씨 아파요?

그날 오후 2시 쯤. 마리는 전화벨 소리에 깼다. 핸드폰 화면에 익숙한 번호가 떴다. 아직 저장은 하지 않았지만 이 번호는 이목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마리씨?”

“네. 무슨 일 있어요? 저 오늘 아파서 못 간다고 철희씨 한테 말씀드렸는데....”

“아니, 아프다고 해서요. 괜찮아요?”

“아....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몸살인가 봐요. 누가 잘 때 절 때린 건지...”

“하하하. 뭐예요? 그게. 약은 먹었어요?”

“아뇨.”

“밥은 먹었어요?”

“아뇨. 지금 일어났어요.”

“아...그래요? 나도 오늘 밤에 사무실 가려고 해서 밥 먹으려고 하는데 죽이라도 먹을래요?”

“가..같이요??”

“하하. 네. ”

“사장님은 안 아프잖아요. 죽 먹고 싶어요?”

“아.... 그럼...마리씨 이따 카페 알바는 가요?”

“네. 가야죠.”

“그럼 더 쉬다가 나가요.”

“네. 내일은 사무실나갈게요.”

“그래요.”

전화를 끊었다. 잠이 덜 깨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죽을 챙겨주겠다는 선의를 거절한 것 같았다. 이도 저도 다 마리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지도 모르겠지만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노동만 하다가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영어 단어 책을 꺼내 훑어보다가 머리가 빙빙 돌아 다시 집어 던졌다.

조금 스트레칭을 하고 오랜 샤워를 하고 나니 배도 고파오면서 컨디션이 훨씬 나아졌다. 퉁퉁 부은 종아리를 마사지를 해주고 나갈 준비를 하니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카페에 가서 기분 전환을 하기로 했다. 욱은 카페에 간 적도 드물지만 카페에 가면 다 돈 많은 것들이 돈 지랄 한다면서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보이는 여자마다 하나하나 품평을 했다. 마리는 서울에 갓 올라와서 욱을 만났기 때문에 점점 저렇게 변한 욱이 안타까웠다. 뒤틀린 욱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마리는 카페에 가서 조용히 다이어리에 한 단어라도 쓰고 싶었다. 도저히 이 기분으로는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섰다. 차분한 음악과 높은 천장. 조도가 잘 설정된 조명. 마음이 편안해 졌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람 많은 카페는 시장 통보다 더 정신이 없었으니까. 좋은 자리를 훑어보면서 찾았다. 창가 자리에 자리가 났다. 카푸치노를 들고 앉았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이 한 잔의 가격이라면 아마 된장찌개를 두 번 정도 끓여 먹을 수 있는 돈이겠지, 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마리는 다이어리를 꺼냈다.

서류 접수날짜에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그리고 어제 날짜에 ‘욱’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어줘.’라고 썼다. 멍하니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수많은 생각들을 했다. 엉켜진 생각들이 아마 이런 편두통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생각이 생각을 이었다. 갑자기 시간을 보니 알바하려면 뛰어가야 할 판이었다.

‘아이 씨.’

급히 문을 나서는데 이목이 보였다. 뒷모습이 매우 여성스럽고 예쁜 여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이목은 예의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저 사람은 모든 여자한테 다정한 스타일인거야.’

혹시나 마리는 자신이 도끼병에 걸렸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다잡았다.

다음 날 아침 마리는 사무실에 갔다. 한 시간 뒤 늦게 이목은 출근을 했다.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보였다. 손에는 약봉지가 있었다.

철희가 물어봤다.

“뭐래? 병원에서?”

“고혈압이래.”

“잘 한다. 그 나이에 고혈압이라니.”

“막 내일 죽을 지도 모른다고 엄청 겁줬어.”

“괜찮..으세요?”

마리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괜히 자길 걱정해줬는데 죽 사준다는 것을 거절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목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마리는 점심 메뉴는 뭔가 그래도 이목이 좋아할 만한 게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곤 마리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 문을 열고 보이는 것은 곧 이목이 사무실 뒤 에어컨이 나오는 난간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두 눈은 마리가 화장실 쪽으로 간 방향 그대로에 꽂혀 있는 듯 했다. 마리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둘 다 피하지 않았다. 이목의 두 눈은 너무도 컸고 너무도 어두운 블랙이었다. 아마 저 눈 안에는 블랙홀이 있을 지도 몰랐다. 그 두 눈이 소의 눈처럼 처량하고 크고 애처로웠다. 저렇게 키가 크고 몸이 좋은 남자가 두 다리를 쪼그리고 아파하는 모습이 아이러니 하면서도 슬퍼보였다.

본능적으로 마리는 그 두 눈이 자기의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근데 왜 너는 누군지 모르겠지?, 라고 묻는 두 눈이었다. 아니면 날 좀 구해줘, 라고 말하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리는 이 모든 것이 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오후에 예쁜 여자와 너무도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이목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눈빛으로만 말하는 게 그냥 저런 남자의 습관인지도 몰랐다. 이제 더 이상 남자들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마리는 눈을 내리깔고 자리로 들어갔다. 무언가 굉장히 실망한 듯 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냥 들어가서 자.”

철희가 말했다. 이목은 힘없이 약봉지를 들고 나갔다.

“푹 쉬세요...” 라고 마리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러나 이목은 답이 없었다. 마리는 무언가 하고 싶었지만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괜한 오해를 받는 것도 싫었다. 남자라는 족속들은 웃다가 눈만 마주쳐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거절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잘 웃고 끼를 부리고 술을 마시면 터치를 하고 근데 고백을 해오면 아닌 척, 그리고 매우 미안한 척 연기를 해대는 여자 친구들을 많이 봐온 터였다. 다 지긋지긋했다.

감정놀음.

‘난 그런 놀이할 시간도 처지도 아니야. ’

마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런 식으로 남자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는 ‘욱’의 이기적인 마음에 화가 났다.

‘너 이렇게 일하고 늦게 들어오고 회식하고 그러면 다른 남자한테 금방 넘어가겠네. 너도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아.’

이렇게 욱은 마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줬다. 여태까지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보낸 이. 그리고 한 때는 알콩 달콩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장난을 치고 이야기를 나눴던 둘. 이젠 그 유통기한은 지나고도 한 참을 지났다. 하지만 욱은 그녀의 마음이 떠난 지도 몰랐다. 이미 떠나고 한 참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런 욱에게 마지막으로 마리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깨달을 시간.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의 그런 배려는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결코 그런 종류의 남자들은 평생이 지나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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