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와줄 수 있어요...? 라고 남자가 말했다.
마리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뉘였다. 씻을 힘조차 없었다. 씻고 정신이 좀 깨이면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컴퓨터를 하다 늦게 잠들면 겨우겨우 일어나 사무실에 가고 집 안은 엉망진창이고, 그런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밤이 돼서 친구들의 회사 생활 힘들다는 대화를 보고 있지 않고 뻗어버리면 마음은 편했다. 지금은 학교 친구들을 만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잠시 비스듬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전화가 울렸다. 진동이 멍 때리던 마리를 깨웠다. 느낌 상 욱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욱 밖에 없었다. 자신이 외로울 때, 견딜 수 없을 때만 연락하는 사람이었다. 금방 진동은 꺼졌다.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많이 나아진 것이다. 마리는 스스로 대견했다. 예전 같으면 욱의 전화를 못 받을까봐 안절부절 했다.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울린 건 아닐까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
얼마 후 문자가 왔다는 알림소리가 들렸다.
샤워를 하러 일어나려고 문자를 봤다.
마리씨...보면 바로 전화 좀 줘요..
이목이었다. 이젠 이목이라고 핸드폰에 저장이 되어 있었다. 뭔가 급한 일인 것 같았다. 가끔은 불한당처럼 보이고 가끔은 선수처럼 보여도 상식선은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리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마리예요.”
“...마리씨..”
“무슨 일이에요??”
“혹시.... 정말 미안한데... 좀 와줄 수 있어요?”
“네? 사무실로요?”
“아뇨. 집으로요. 사무실에서 멀지 않아요. 내가 지금 너무 아픈데..... 철희 형은 너무 멀리 살고......친한 후배들도 다 방학이라 멀리 있네요.”
“아.....”
“아..괜한 부탁을 한 것 같아요.”
마리는 이상한 짓을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게다가 아까 퇴근하던 모습도 매우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마리씨.... 그냥 둬요..”
“아니에요! 갈게요. 주소 찍어 주세요.”
마리는 택시를 타고 내렸다. 분명 아무 것도 먹지 않았을 것 같았다. 스타일을 보면 집에 먹을 것도 없을 거고. 편의점에 들러 죽과 오렌지 주스, 우유, 바나나를 샀다. 혹시 몰라 생수도 한 병 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울로 보이는 얼굴을 봤다. 경황이 없어 화장도 못 고쳤다. 티슈로 얼굴을 몇 번 눌러주고 수정만 했다. 얼굴에 신경 쓰는 자신의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립스틱을 바르려다가 틴트만 발랐다. 엘리베이터는 도착했고 마리의 심장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부탁이라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잘 모르는 남자의 집에 찾아간다는 게 멍청한 짓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었다. 상태만 확인하고 바로 가면 된다고 되뇌었다.
문자로 비밀번호를 알려줬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어설 수도 없다고 문자로 주소와 함께 비번을 알려준 것이다. 불은 꺼져 있었고 핸드폰에서 나오는 빛에서 이목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저 왔어요. 불 좀 켤게요.”
마리는 불을 켰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목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왔어요? 고마워요.”
이목은 일어나려고 했다.
“아니에요. 일어나지 말아요. 밥 먹었어요?”
이목은 고개를 저었다.
“증상이 어때요?”
“막 천장이 내려앉을 것 같고 몰라요, 숨도 못 쉬겠고. 가위 눌린 것처럼 계속 꼼짝 못하다가 겨우 손가락을 움직여서 철희 형한테... 연락..했어요... 그러다가...”
이목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밥은 먹었어요?”
이목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예상대로 텅텅 비었다. 거의 비어 있는 생수병만 덩그라니 들어 있었다. 마리는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물을 따랐다.
“좀 일어나봐요. 물 좀 마셔봐요.”
어쩔 수 없이 마리는 이목의 등을 만져야 했다. 딱딱한 등이 손에 느껴졌다. 이목은 마리의 작은 손이 자기를 부축하는 것을 느꼈다. 그 손은 따뜻했다.
이목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어지러웠다.
마리는 죽을 떠서 이목의 입으로 가져갔다.
“아~ 해요.”
이목은 이 상황이 좀 웃겼지만 그냥 말 잘 듣는 어린 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죽을 먹었다. 마리는 이렇게 세상 무서울 것 없게 생긴 부리부리한 남자가 자기 말을 유치원 아이처럼 잘 듣는 것이 좀 재밌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금방 죽을 지도 모른대.’ 라고 했던 이목이 낮에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 것일까?’
죽을 다 비운 이목에게 마리는 기다리라고 하고 약봉지를 찾았다. 약과 물을 가지고 왔다.
“약은 식 후 30분 후에 먹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간호사님?”
이목이 물었다. 간호사님이란 말에 마리는 피식 웃었다.
“전 지금 나이팅게일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냥 먹어도 돼요. 약을 아까 안먹었죠?”
“네. 선생님.”
마리는 웃었다. 저렇게 농담할 기운이 났으니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까 와서 그냥 계속 잤어요.”
“밥도 먹고 약도 먹고 해야지 나아지지요. 엄청 천재 같은데 바보네요.”
“마리씨는 제가 천재 같아요?”
“네. 보통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하하하.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쯧쯧쯧. 지금은 좀 어때요?”
“약간 울렁거렸는데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럼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아니, 아니. 아직도 심장이 튀어 나올 것 같고 힘들어요.”
“뭐에요...? 진짜요? ”
둘은 배시시 힘없이 웃었다.
“아까 병원에선 뭐라 그런 거에요?”
마리는 이상하게 사무실에서와 달리 술술 말이 나오는 자신을 보고 조금 놀랐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목과 많이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목은 금방 친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혈압이 좀 있어요.”
“네? 벌써요?”
“집안 내력이 있거든요. 심장도 안 좋고. 할아버지, 어머니 다 심장이나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죠. 그래서 의사가 그렇게 말 한 거죠.”
“아.......그렇구나. 우리 집은 암이 있는데, 여자만 걸려요. 삼 대 째.”
“그럼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지금은 괜찮으시겠죠? 아프지는 않으실 테니. 하늘에서. ”
“몇 살 때?”
“기억도 안나요. 8살.”
“아.....너무 일찍 가셨네.”
이목은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마리는 참으로 신기했다. 집안의 비극을 이야기 하는 건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주변에는 정말 부러울 것 없이 큰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공부를 하고 있으면 과일과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는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분위기에서 커온 아이들이었다. 우연히 이야기를 했다가 우울한 얘기는 그만 하자고 잘라내는 바람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마리였다. 그 이후 친구란 존재는 마리에겐 없었다. 그래서 욱에게 더 매달렸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목에게는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그를 따르는 것이리라.
이목은 마리의 덤덤한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눈을 내리깔고 침대 옆에 걸터앉은 마리를 안고 싶었다. 저 슬픔을 담은 두 눈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이목은 깊은 숨을 쉬었다.
“힘들어요? 이제 좀 누워서 쉬어요.”
“근데 마리씨. 난 이기적이니까 걍 부탁할게요. 나 잠 든 다음에 가면 안돼요? 아님 지금 너무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도 돼요. 저기 라꾸라꾸 침대 있어요. 후배들이 많이 자고 가서 이불도 있고.”
“음. 일단 알았어요. 누워서 눈감아요. ”
이목은 눈을 감았다. 마리는 냉장고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불은 푹신해보였고 이목은 어린 아이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침실에 불을 끄고 마리는 부엌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