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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아 Sep 07. 2020

폭식증 상담받는 남자는 왜 없을까?

왜 나는 늘 먹고 나서 후회할까

사무직에 종사하는 32살 동한씨는 요새 자꾸 불어나는 체중 때문에 고민입니다. 밤만 되면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야식의 유혹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특히나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들 때면 치킨 한 마리에 맥주 두 캔, 연달아 과자 두 세 봉지와 아이스크림 한 통을 때려 먹고 나서야 정신이 들곤 합니다. 사실, 요새 회사에서 부장님이 자꾸 나에게만 지적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아 동한씨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부장님이고 뭐고 들이 받을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내 능력에 다른 회사로 바로 이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다른 회사라고 상황이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는 중입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지만,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 편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따가 해야 할 일들이 떠올라서 제대로 먹는 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괜히 많이 먹었다가 속이 안 좋아서 오후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린 적도 있기에 점심은 ‘한 끼 때운다’는 마음으로 먹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집에 오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무도 눈치 보지 않고 먹는 야식이 행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남들도 다 이렇게 살지 않나 싶은 안일한 마음입니다. 다만, 허리 벨트에 자꾸 배가 끼어 앉아있는 게 너무 불편하고, 과장님이 지나가면서 “동한씨. 요새 뭘 그렇게 잘 먹고 다녀?”라고 하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합니다. 또, 지난 몇 달간 식비 지출이 더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이번 달 월급이 들어오면 헬스장에 가서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어보자고 다짐은 몇 달째 하고 있지만, 막상 집에 오면 어디를 나가고 싶지도, 나갈 기운도 없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체중과 카드 값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면 좀 나아질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귀찮고 무기력한 마음이 변화해보려는 마음을 기어이 이기고야 말았는지 동한씨는 또다시 치킨을 찾습니다.





저는 스트레스성 폭식, 폭식증을 주제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남성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주제(우울, 불안, 공황장애 등)로 상담실을 찾았는데, 알고 보니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경우는 몇 번 있었죠.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마 다른 센터와 병원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사례에 나오는 동한씨처럼 정서적인 허기와,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음식으로 풀게 되더라도 남성은 여성보다 그것을 문제로 인식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는 사회적인 인식과도 관련이 있죠. 우선, 과식과 과음으로 스트레스를 넘기려는 분들이 주위에 꽤나 많다보니 ‘남들도 다 그렇지 뭐’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합니다. ‘우울증은 치료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폭식 같은 경우에는 아직 상담을 받고, 치료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나 요새 너무 많이 먹어. 야식으로 스트레스 푸는 듯”이라고 푸념하듯 얘기하면 “음식으로 스트레스 풀 수도 있지. 그게 인생의 낙인데 뭐.”라는 정도의 답변이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결국 돌고 돌아 나중에 정말 우울해지거나, 불안이 심해져 공황 발작 증세들이 나타나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죠. 


또 다른 이유를 꼽자면, (많이 바뀌고 있는 중이지만) 사회적으로 남성이 많이 먹거나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경우, 여성이 그랬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관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체중이 늘어나지 않는 이상은 ‘나 요새 살 좀 쪘네.’하고 스스로도 넘어가기가 쉽다는 것이죠. 반면, 여성들은 반복되는 폭식으로 살이 찌고 나면,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끼며 상담실을 찾곤 합니다. “저 요새 너무 많이 먹어서 살쪘어요. 고치고 싶어요.”라고 하면서요.


남성이 여성보다 폭식이 문제라고 인식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음식 문제에서 더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심한 다이어트가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신경성 식욕부진증(흔히 거식증이라고 부르는)과 신경성 폭식증(흔히 폭식증, 폭토라고 부르는)의 경우에는 여성이 전체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히 여성이 겪는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폭식을 특징으로 하는 폭식장애의 경우에는 남녀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고 하네요. 또, 저는 개인적으로 남성이 ‘폭식하기 더 좋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그나마 수다를 떨고, 울기도 하면서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할 수 있죠. 하지만 사회적인 이유로 남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이런 기회가 더 적었을 거예요. 여기에 더해 많이 먹거나 살찌더라도 사람들이 더 관대하게 봐주었다면..? 음식을 자연스럽게 감정 해소 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겠죠.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 주변에는 폭식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수 있겠죠?


<또, 먹어버렸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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