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취해 규칙을 찾는 이상한 상태
자발적 강제성 찾기
1. 논문 원고 수정하기 위해 선행연구 더 찾아보기
2. 원고 수정 후 학회지 투고하기
3. 엔젤투자 선정받기 위한 기획안 작성 마무리하기
4. 카카오임팩트 브런치세션 다녀온 후기 쓰기
5. 병원 가서 다 떨어진 약 재처방 받아오기
6. 학교 앞 식당 가서 두고 온 목도리 찾아오기
7. yes24에 중고책 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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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소, 데일리 운동, 책 읽기 등 사사로운 일들을 빼고도 당장에 시작해야 할 일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이 무거운 몸뚱아리는 하나의 체크리스트를 끝내기가 무섭게 다시 방석에 앉아버리거나(양반), 침대 속으로 들어가 반쯤 누운 건지 앉은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버린다. 출퇴근자였다면 '나 지금 일 때문에 힘들어서 번아웃(burn out) 상태야.'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사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상태라 온전히 원인이 내게 있어 보인다. 아니, 추측성으로 문장을 끝내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문제다.
논문이 너무 쓰기 싫다.
첫째로, 내 안에서의 동기부여가 없다. 가장 급하면서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 하는 데다가, 지도교수님의 부름에 소환되어(사실 이건 굉장히 감사한 일이다. 부름 받을까 봐 도망 다니던 졸업생을 다시 굳이 불러내다가 작업을 맡기시는 건 그만큼 마음을 써주시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게다가 학위논문이 아니라 학회지 투고는 강단에 서있는 본인의 커리어에도 눈곱만큼일지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트랙을 뛰기 시작해버린 일이다. '이걸 뛰고 나면 네가 더 건강해질 거야'와 같은 교과서적인 이유 외에는 왜 뛰어야 하는지, 난 정말 뛰고 싶은지 그 이유를 아직 내게서 1도 찾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권위에 의한 움직임은 '하기싫어병'에 걸리게 하기 충분하다.
둘째로, 보상이 없다. 다들 매일 아침 출근하기 싫다고 SNS에 도배를 하고, 퇴사하고 싶다고 품에 사직서를 넣어 다녀도 월급을 보고 참곤 한다. 내 논문 작업은 현재 보수가 없다. 굳이 보상을 따지자면 내가 제1 저자라는 점이지만, 내 석사 학위 논문을 축약해서 제출하는 거니까 당연한 거라 보상으로 와 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내 논문 내용으로 쓰는 건데 보수를 바라면 안 되는 건가(?)보다. 매번 억지로 소환되어서 마지노선의 퀄리티로 작업하는데 보수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내가 참 염치없다. 보수가 있었다면 그나마 좀 더 성실함을 얹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학위논문은 개똥 같은 글을 제출해도 패스권만 받아낸다면 학위를 얻을 수 있었으니 이어나갔던 것이니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다.
셋째로, 데드라인이 없다. 학위논문은 심사를 받기 위한 마감 기한이 있다. 그 안에서 쪼개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페이지 수를 늘려가고, 편집을 하고 심사를 받고 제출을 한다. 학회지는 정기 발행물이기에 특별한 데드라인이 없다. 그렇기에 나도 지도교수님과의 다음 미팅 약속을 잡을 때 비겁하게도 자꾸 날짜를 내가 먼저 말하지 않게 된다. 그걸 지키지 못하면 내가 뱉은 말도 지키지 못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거니까, 약속 기한을 교수님이 잡으시도록 슬쩍 책임을 전가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결국 내게 또 '숙제'를 받아가게 되는 상황으로 바꿔버린다. 숙제를 싫어하면서 숙제로 만들어버리는 나는 분명 나태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현생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내게 나타나는 큰 신체화 하나가 바로 계속 졸려한다는 것이다. 잠으로 도피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하기 싫은 마음에서 자꾸 나는 내 논문은 학회지에 낼 정도의 퀄리티는 커녕 내 이름이 걸리는 게 부끄러울 정도라서 지금 하고 있는 짓(?)이 과연 맞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불 속에서 자신감 결여된 말을 자꾸 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아들러는 이런 모습이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며, 딱 적절한 핑곗거리가 될 뿐이라고 하며 나 같은 애들을 말로 혼내준다.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속이는 직무유기는 결국 나를 좀먹게 하는 나쁜 피드백인 것이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으니 책상 정리가 필요해 보이고, 마음먹고 시작하자니 시간이 12시 42분이라서 딱 15분 정도만 쉬고 정각 1시부터면 완벽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그 해소를 위해 평소에 하지도 않던 게임을 다운받아서 하고 있었던 며칠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날 믿고 불러주신 교수님과의 관계도, 논문도, 논문이 어느 정도 끝나야 할 수 있는 다음의 내 할 일들도, 건강도, 습관도, 뭣도 다 망가지고 후회하는 연말을 맞이하게 될 것 같은 나는 자유에 취해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할 규칙을 찾게 되었다. 하나는 격주에 한 편씩 글을 써서 올리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 #씨리얼노트 를 시작했고, 다른 하나는 매일 자신이 정한 시간에 기상 인증을 하고, 자기 계발이나 하루의 소소한 행복을 위한 노력을 실천한 것을 인증하는 오픈 카톡방에 조인하게 되었다.
#씨리얼노트 는 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목요일의 글쓰기'모임에서 따왔다. 목요일의 글쓰기 모임은 일주일에 한 편이라 약간 부담도 되었고, 오프라인 만남도 있었는 데다가 이미 만들어진 사모임에 끼어드는 기분이 들어 처음부터 함께할 의향은 없었으나 그 플랫폼은 꽤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씨리얼노트 는 격주로 매 1,3째 화요일을 기준으로 잡았다. 씨리얼 한 그릇 호로록뚝딱 쉽게 마시는 것처럼 글을 가볍게 시작해보자는 의미로 이름을 씨리얼이라고 지었다. 글의 주제와 분량, 올리는 공간 모두 글쓴이들의 자유에 맡기며 피드백 또한 하지 않기로 했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그 시작이 어려워서 씨리얼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시도를 가벼이 하고 싶었는데, 그 시작이 보여주기 위한, 피드백을 위한 글이 되어 버린다면 취지와 맞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 작성을 하면 글을 올린 링크만 공유한다. 들어가서 읽든 안 읽든 다른 파티원의 자유. 오프라인 만남도 없다. 이 씨리얼노트의 목적은 꾸준히 글을 쓰게 하기 위한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기 오직 이 하나이다. 숙제와 자발적 취미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절대 숙제로 넘어가지 않게 조절하는 것이 참여하는 모두의 역할이다. 이제 겨우 2 회차다. 인스타그램 @cereal_writingclub으로 오면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함께 씨리얼 한 문단 뚝딱 마실 수 있다. 참여를 원하는 자는 DM!
오픈카톡방은 일부러 인원수가 적은 방을 찾았다. 사담이 많으면 목적이 흐려지기에 사담이 없는 방을 찾았다. 현재 나를 포함하여 5명 정도이며, 2글자의 닉네임/원하는 기상시간을 오픈채팅방의 대화명으로 설정하고, 매일 자신의 기상시간+10분까지 인증이 인정된다. 시계를 찍어보내도 되고, 폰 화면 캡쳐해서 보내도 된다. 내가 이런 방에 들어갔다고 하니 친구 한 명이 그거 캡쳐해서 보내고 다시 자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속일 바에야 그 방에 왜 굳이 들어가 있겠냐고, 스스로 선택해서 들어간 방인데 자괴감 들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 방에 계신 분들도 인증에 실패한 날은 솔직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해둔 규칙은 사전에 타당한 사유를 먼저 말하지 않고 일주일에 4번이상 실패할 경우는 강퇴다. 이곳 역시 숙제와 자발적 계발의 줄타기에서 자발적 범주에 있도록 약간의 강제성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늘이 방에 들어간지 일주일 정도 된 것 같고, 안그래도 이불 속에서 나오기 어려운 계절인데 아침 운동에 가는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학생도 직장인도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상태인 내가 그 자유에 취해, 방종으로 흘러갈까봐 지레 겁나 약간의 강제성을 위해 규칙을 만들고 찾았다. <하기 싫은 힘을 하는 힘>이라는 책에서도 결국 결론에서 하기 싫은 마음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싫은 일을 하는 것을 연습으로 삼으라고 한다. 이 어불성설같은 말은 결국 시작하는 2분이 어렵지, 시작을 하고 나면 그 행동 자체가 하기 싫어하는 내 마음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왜 그랬는지 이해해주고, 다독여주는 힘을 얻는 가장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씨리얼노트도 이렇게 마무리하였으니, 하루 종일 미뤘던 오늘의 논문 작업을 딱 2분만 시작해보고 더 할지 말지 내게 물어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