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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야 Sep 28. 2015

지금을 산다는 것

틈 아홉, 환상과 현실의 틈

요새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Le città invisibili>을 읽고 있다.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글을 곱씹느라 읽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그렇게 2주를 보냈더니 어젯밤 꿈에는 뉴욕에 다녀왔다. 내가 지내던 방 침대의 삐걱거림, 매일 오가던 길의 보도블록 무늬, 매일 타고 내리던 지하철 역의 조잡한 낙서까지 꿈에서 모두 듣고 보았다. 뉴욕의 강렬함 때문이기도 하고, 여행 중 4달이나 눌러 앉았던 도시이기도 해서 모든 것이 이토록 생생하다.


여행을 다녀오면, 여행지가 환상으로 남는 경우가 있고 현실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있다. 환상으로 남으면 '내가 이 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아련하고 슬픈 기분이 든다. 다시는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아 생기는 두려움도 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사는 곳과 여행지의 물리적 거리도 멀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여행지가 현실의 일부가 되면 지금 현관문을 나서도 그 장소가 바로 눈 앞에 펼쳐질 것 같은 생생함이 있다. 그래서 그곳과 지금 내가 사는 곳을 동시에 살게 된다. 그 곳을 떠올릴 때 아련하거나 환상적이지 않으며 슬픔이나 열망도 없다. 뉴욕이 나에게는 그런 곳이다.


처음에는 뉴욕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눌러 앉았다. 하지만 새로움이 내뿜는 찬란함은 어김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뉴욕에 막 도착해 뉴욕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내뱉는 외마디 탄성 같은 것들, 나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그 사람들의 순간을 질투했다.


새로운 도시의 매혹, 여행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외로움과 같은 일상적 감정, 돈걱정 같은 고민, 밥을 먹고, 걷는 일 같은 평범한 것들이 남았다. 이 동네 저 동네, 골목 골목을 걸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두지 않는 카페나 공원에 앉아 사람들 수다를 듣거나, 사람들이 읽는 책이나 신문을 엿보았다. 사람들의 발 걸음을 한참 보거나, 창문 너머로 일하는 모습을 훔쳐 보거나, 먹고 마시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런 일상을 여러 날 반복하던 어느 날, 이제 서울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서 자주 들르던 서점. 서가에 있는 책들을 거진 다 섭렵해서 나중에는 서점에서도 대화를 엿들었다. 직원과 손님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 그린 그림.


서울에 돌아와서도 서울 곳곳을 걸었다. 신기한 동네나 골목들을 걸으며 전에는 몰랐던 서울의 결을 발견했다. 도시의 결을 발견하는 일은 백수의 시간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매일 현실을 사는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을 더듬었다. 도시마다 어쩔 수 없는 혹은 자연스러운 객관적 차이들이 있지만, 서울 사람들이 일상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움은 뉴욕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에게 뉴욕과 서울은 모두 현실이 되었다. 4달의 뉴욕 생활 혹은 여행 이후, 나는 새로움과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으로 현실을 대하는 횟수가 줄었다. 그 욕망이 없어도 삶에는 값진 것이 많다고 느낀다.


여전히 하루 종일 헤엄쳤던 타오르미나의 바다나, 해 질 무렵 바라본 몽상미셸의 밀물, 저렴하고 맛 좋은 음식이 가득한 카타니아에서의 날들은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기억들은 나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환상이다. 아름답지만 나는 그 환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여행은 간간이 다니지만, 이제는 환상과 현실을 애써 구분 짓지 않는다. 내 환상과 현실의 틈에는 내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이 있다.


마지막 틈은 9월 30일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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