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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쥐새댁 Nov 12. 2020

“자가야, 전세야?” 아주 불편합니다

“자가야, 전세야?”

이번 주 이 질문을 받은 횟수를 따져봤다. 4번이었다. 이런 질문을 건네는 사람은 다양했다. 회사 다른 부서 상사이거나 대학 후배이거나. 나이와 직급에 상관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물론 질문의 형식은 조금씩 다르다. 대놓고 물어보거나, 아니면 꽤 예의 바르게 ‘실례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거나.


질문자와 질문 형식에 상관없이 답은 명쾌해야 했다. “둘 다”라거나 얼버무릴 수 있는 질문도 아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질문에 답하는 내 목소리는 괜스레 기어들어간다. “자가요...”


일단 집을 사서 이사를 간 거라고 하면 반응은 늘 비슷하다. “이야, 서울에 집을 마련했네?” “성공했다”는 식이다. 더 좋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거기 학군이 안 좋은데” “아예 강남으로 가야지”라고 훈수를 두는 경우도 있다. 그리곤 더 불편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서울 어디?” “무슨 동?”. 그러면 내 대답도 똑같다. “그냥 오래된 아파트고 작은 평수예요”. 앞서 언급했듯이 나와 남편은 누가 뭐래도 우리 집을 너무너무너무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하는데, 남들 앞에서는 내새끼의 단점만을 늘어놓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질문은 끝이 없고 결국 내가 사는 아파트 이름을 말해야 끝이 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 집은 고가 아파트도 아니다. 그저 내 눈에 좋은 곳이어서 글을 읽는 분들이 불편하지 않길 바란다 )


예전에는 속으로 ‘아파트 이름 말하면 알긴 아냐?’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다. 면전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아파트 이름을 검색한 사람도 있었다. 사람 앞에서 얼마인지 시세를 확인하면 정말 벌거벗은 기분이 든다. 내가 멋쩍게 작은 목소리를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서울에 집 가진 사람은 ‘적폐’로 몰리는 세상 아니던가. 요즘은 집을 매매하는 대신 전세로 사는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낀다는 기사가 쏟아지는 때지 않나. 질문한 사람이 ‘집 사는 시기를 놓쳤다’고 고백하면 정말 아차 싶어 진다. 죄인이 되는 기분이 든다.


사실 이런 상황을 이사 당시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11월에 기존 집을 매도하고 집을 구하러 다니고, 대출 상담을 받는 모든 과정을 조용히 진행했다. 그리고 1월에 이사를 하면서 특히 회사에는 직속 상사에게만 말을 하고 조용히 이사를 했다. 모든 사람들이 부동산 이야기만 할 때였다. 옆 부서 “**이는 **(장소)에 집을 샀대” 이런 말이 늘 회식 자리에서 나왔다. 얼굴도 못 본 사람이 어느 지역 어떤 아파트 분양을 받고 대출을 얼마 받아서 산 건지, 알고 싶지 않아도 소문으로 듣게 됐다. 당사자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회사에서 같은 시기 집을 산 사람과 전세를 산 사람을 비교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안방에서 바라본 하늘

사실 과거에 “어디 살아요?”라는 질문은 별 의도가 없는, 일종의 정보 탐색과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 전 인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서울에 대학교까지 1시간 20분 거리를 자취하지 않고 매일 통학했고, 결혼하기 전 6년가량을 서울에 있는 회사로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출퇴근을 했다. 적어도 5년 전쯤에는 다른 사람이 어디 아파트에 사는지, 분양을 받은 건지, 얼마짜리 집에 사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자가냐, 전세냐 하는 질문은 서로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출퇴근 시간을 걱정해주고 동네 이야기를 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꼬박 14년을 출퇴근 길에 꽤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살았다. 신혼집을 서울로 구한 뒤에도 버스를 타고 50분은 이동해야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중앙차도를 벗어나는 구간에서는 퇴근길 한없이 밀리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그냥 서서 시간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면 늘 녹초가 됐는데 그게 ‘회사일이 힘들어서’ ‘공부가 힘들어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회사 근처로 이사를 결심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힌 건 당연히 ‘돈’이었다. 서울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그래서 신축은 언감생심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구축이면서 작더라도 따뜻한 집을 알아봤던 것 같다. 그렇게 얻은 소중한 집이었다. 당연히 은행의 도움을 받아 산 집이다.


그런데 “어디 살아?”라는 질문이 나오면 14년 동안 꼬박 두 시간을 들여 출퇴근을 했던 과거의 나의 수고로움이 ‘변명’이 돼 버린다. 앞서도 말했지만 남편과 나는 다주택자도 아니고 그저 보금자리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가 왜 이사를 하고 싶었는지, 왜 이 지역을 선택했는지 멋대로 생각해버린다. 물론 교통이 편리하고 학군이 좋은 동네는 집값 상승의 기대도 높은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출퇴근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남편의 건강을 내가 아주 많이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이 내용을 소개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의 대답이 누군가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도 싫고 ‘우월적 감정(내가 사는 곳 보다 본인의 동네가 더 좋다는 이유로)’을 들게 하는 것도 싫다. 집은 집이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천박한 자본주의가 덧씌워진 걸까.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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