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에세이] 그냥 싫어해도 된다

15년 차 구성작가의 일상 구성

by 제윤김

'가까이 오지도 마세요. 칼로 찔러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매일같이 옆에 앉아서 일하는 직장 후배의 카톡 프로필이 이렇게 돼 있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나에게 하는 말은 아니겠거니' 태평할 수 있나? SNS 프로필은 개인의 영역이니 존중할 수 있나?
그 프로필 메시지를 확인한 난 그렇게 쿨하진 못했다. 괜히 긁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말 내내 가슴앓이를 한 나는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차마 "나한테 하는 말이야?"라고는 묻지는 못하고 "혹시 무슨 일 있어? 회사 생활이 그 정도로 힘든 거라면 내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완곡한 표현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 친구는 회사 일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며 오해를 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덧붙이며.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이 계속 들었던 것은 그 후배가 회사 생활, 혹은 선배인 나에게 불만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2살 어린 서브작가였던 그 후배와의 관계는 나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
그 후배와 일을 하게 된 건 서브작가로 일하던 프로그램에서 4년 만에 다시 돌아가게 되면서부터다. 메인작가되어 돌아가는 나름 화려한 복귀였다. 그전에도 꽤 오래 일한, 10년여 작가 경력에서 가장 애정이 있던 프로그램에 메인작가로 가게 된다니,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우려가 무색하게 일은 순조로웠다. 이곳에 앉아서 일했던 것이 어제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바로 그 서브작가였다.


막내작가, 서브작가를 거치며 별별 이상한 선배작가들을 겪었던 난 이상한 선배 작가 대하기에는 어느 정도 도가 트여있었다.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고, 그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여기저기 험담을 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그냥 무조건 선배가 이상한 거였고, 난 피해자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중에 난 절대 안 저래!'


그런데 후배와의 관계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스트레스였다. 일단 후배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부터 내가 그려온 메인작가가 된 나의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혔다. 메인작가가 된 난 후배의 입장을 너무 잘 알고 일도 효율적으로 잘하기 때문에 후배와의 문제가 있으면 안 됐다. 그런데 첫 메인을 달자마자 후배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선배가 돼서 후배를 감싸줘야지 함부로 욕을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난 스트레스를 못 이겨 그 후배의 험담을 조금이라도 한 날은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선배가 돼서 이게 뭐 하는 건가 하고.


그 후배를 너무 이해하고 싶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출, 퇴근을 하며 인사를 한 번도 제대로 안 하는 것도. 회의 때 집중하지 않아 업무를 누락해도. 약간의 업무 지적에도 발작을 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다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카톡 프로필에 죽여버리겠다고 써놓은 것도 '얼마나 괴로우면 그럴까'하고 이해하려고 했겠는가.


난 후배의 실수를 메꿔주려 노력했고 의아한 점이 있으면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며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꼭 나쁜 남자와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 아이의 행동하나 말투하나에 너무나 의미를 부여하며 영향을 받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 노력은 보답받지 못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그 후배는 다른 후배에게 하는 내 업무 지시까지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친구 눈치를 보다 업무에까지 지장을 주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난 결국 '좋은 메인작가'되기를 포기했다.
그냥 그 후배를 싫어하기로 했다. 싫어하기로 마음먹으니 갑자기 마음이 너무 편했다. 괜히 좋은 메인작가 코스프레하며 이해 노력할 때는 마음이 갈팡질팡이었는데 싫어하기로 마음먹으니 그냥 '갈팡'하는 내 마음만 신경 쓰면 됐다.


후배를 싫어하며 느끼는 내 마음의 괴리감을 인정했다. 그냥 싫은 건 싫은 거야. 위선 떨지 마.


그 후배 눈치가 보여 자제하던 업무 피드백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며 전달했다. 유독 업무 지적을 못 견뎌하던 그 후배는 업무 누락 지적 3번 만에 노트북을 싸들고 도망가듯 일을 그만뒀다. 허무했다. 고작 저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일하는 아이에게 왜 그동안 마음을 쓴 건지.


결국 걔는 비정상, 나는 정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처음부터 내가 이상한 '좋은 메인작가' 이미지에 심취해있지 않았다면 내 마음이 덜 괴로웠을 것 같다. 좋은 메인작가, 선배작가가 아니면 좀 어떤가. 그냥 좀 구린 선배면 어떤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날 보호할 최소 보호막은 필요하다.

너 나 싫어? 나도 너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