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에세이] 자기만의 책상

15년 차 구성작가의 일상구성

by 제윤김

<자기만의 책상>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이 책은 내가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의 제목 중 하나이다. 100년 전 쓰인 페미니즘 강의 내용에 엄청난 감명을 받아서는 아니다. 나의 지적 허영심을 제대로 자극한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무려 20년 전. 대학교 1학년 1학기 교양수업에서였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어 처음 듣는 강의가 영국 페미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의 책이라니.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도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도 너무 멋진 것 아닌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도 잘 모르던, 이제 막 여대생이 된 난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있어 보인다'라고. 그야말로 대단한 지식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 책에서 1920년대의 버지니아 울프는 주장한다.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당시 교수님은 그렇다면 현대 여성들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다. 당시 온전히 방을 홀로 쓰던, 나만의 책상을 가지고 있던 06학번의 나는 대답했다.


"요즘 세상에 자기만의 방이 없는 여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요? 경제적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참으로 건방진 여대생이었다.


그때 나의 엄마에겐 개인 방이 없었고, 엄마의 수첩이 식탁 위를 굴러 다닌 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답을 하다니.


그 이후 사회에 나와 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자기만의 방'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한 번씩 중요한 화두가 됐다.


현실은 자기만의 방은커녕 자기만의 책상도 사수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방송 구성작가인 나는 커다란 회의 책상에 공간을 나눠 일하는 것에 익숙했고 어쩌다 회사에 자리가 생기더라도 곧 떠나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다. 방송작가들은 스스로의 처지를 ‘메뚜기 신세’라며 자학하기도 한다. 노트북을 들고 여기저기서 일하는 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할 때도 신혼집 공간이 부족했던 남편과 나는 여유 공간에 남편의 컴퓨터 책상을 놓았다.'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남편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그 뒤로 방이 하나 더 늘어나고, 거실은 넓어졌지만 아이 공간으로 활용하느라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지는 않았다.


‘나도 내 방이 필요해!’라는 말에 ‘거실과 안방이 네 것’이라는 남편의 답변을 듣고 발끈하기도 했지만 ‘그래, 식탁에서 하지 뭐’하고 그럭저럭 식탁을 책상 삼아 일을 하고 책을 봤다.


그런데 어느 날 식탁 위를 굴러다니는 내 노트북이 엄마의 수첩과 겹쳐 보이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심했다. 적어도 책상은 사수해야겠다고.


남편에게 외쳤다.

“명색이 나도 작가인데, 내 책상도 없어!”


20살의 난 정말 몰랐다. 내 집에 내 공간 하나를 온전하게 마련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이 정도면 100년 전 자기만의 방을 외쳤던 버지니아 울프가 오히려 더 나은 거 아닌가?


결국 7살이 된 아이를 핑계 삼아, 아이와 함께 쓸 수 있는 키높이 조절 책상을 주문했다. 아직 온전히 내 책상은 아니지만, 적어도 '써보자' 할 때 달려가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 작은 공간이 글에 대한 욕구를 지켜주는 최후의 요새가 되어 줄 것만 같다.


누군가는 고작 그걸로 만족하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버지니아 울프도 만약 아이가 있었다면 나처럼 전략을 수정했을지도 모른다고 변명해 본다.


만약 누군가가 “현대 여성들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20년 전과 같은 질문을 내게 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자기만의 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