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에세이] 사지선다형 선택 이후

by 제윤김

믿기지 않지만, 이제 20년도 더 된 추억이다.


18살 여고생 시절, 시험이 끝난 후 친구들과 카페에 갔다. 그날 우리는 다소 엉뚱한 일을 했다. 10년 뒤 남편이 될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는 펜을 꾹꾹 눌러 편지를 쓰고 부끄러움도 잊고 낭독회까지 가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카페 사장님께서는 우리에게 무려 팥빙수를 서비스로 주셨다. 어른의 눈으로 그때 기억을 되돌리면 여고생들의 순수한 모습에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왔을 것 같다. 풋풋했던 기억은 지금도 아련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때 편지를 쓰면서 난 진심으로 궁금했었다. 과연 난 어떤 사랑을 하고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 대학은 잘 가게 될까?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막막하고 막연했던 10대 시절이었다. 인생은 커다란 빈칸처럼 느껴졌고, 그 빈칸을 무엇으로 채우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났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인생의 빈칸은 거의 채워졌다. 그때 함께 편지를 썼던 친구들도 각자 인생의 답을 찾아 직업을 갖고, 편지를 전해줄 각자의 인연을 만났다.

글을 쓰고 싶었던 난 드라마 작가는 아니지만 구성작가가 됐고, 다양한 남자와 화려한 연애 못했지만 삶의 철학이 분명한 한 남자와 6년의 지지고 볶는 연애 후 결혼을 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안 됐는데,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7년이라는 세월을 키워냈다. 나에게 주어진 미션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다 보니 그럭저럭 남들과 비슷한 평범한 삶을 쟁취해 냈다. 큰 성공은 아니지만 절대 실패라 할 수 없는, 평범한 행복이 있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빈칸을 채우니, 또 다른 막막함을 느낀다. 어린 시절 난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린 이후의 삶은 잘 상상해보지 않은 것 같다. 직업을 선택해서 일을 하면 됐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제2의 직업을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떡하면 가족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해보지 않았다. 백세시대 어린 시절 내 고민의 대부분은 30대가 유효기간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에는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 같았다면 앞으로는 오히려 좀 막막하다. 사지선다형 문제를 풀다가 조건 까다로운 서술형 문제를 풀어야 하는 느낌이랄까. 진로나 연애 같은 비슷한 문제로 함께 머리를 맞대던 친구들도 이제 각자 인생의 돌발퀴즈 같은 문제를 푸느라 바쁘다. 누군가는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하고, 누군가는 가정을 꾸렸지만 결국 이혼을 하고, 결혼과 함께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각자의 일생을 저만의 답변으로 열심히 채워나가고 있다.



어느 날, 계획을 세우기 좋아하는 남편이 어김없이 올해의 계획을 세워보자고 제안했다. 좋다고 대답은 했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글쎄, 올해와 똑같지 않을까? 굳이 계획이 필요할까?"

사실 이대로 굴러만 가도 무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가슴 한편에 어떤 목마름을 느낀다.

문득 깨닫는다.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래에 대한 상상과 호기심이 부족하다는 것 아닐까 하고. 여고시절의 나는 10년 후, 20년 후의 나를 끊임없이 상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난 50대 60대가 된 후의 날 별로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느끼는 이 막막함은 그 상상과 호기심의 부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 인생의 가이드라인은 풀어야 할 문제처럼 주어지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나를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 아닐까.

올해의 계획을 세우기 전, 일단 10년 후 내 모습부터 상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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