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톡으로 통화를 하던 딸이 돌연 화면을 끄고 나가버렸다.
오랜만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매일 얼굴을 맞대지 않으니 가끔 일어났을 뿐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때마침 딸한테, “우와, 넌 참 훌륭하다. 어떻게 그런 걸 그 어린 나이에 깨달을 수가 있냐.”라고 폭풍 칭찬을 한 뒤라 멋쩍었고 당황스러웠 다.
내가 저녁을 먹는 6시나 7시경에 그녀는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그 시각 영국은 아침 9시나 10시경이다. 우린 페이스톡을 켜 놓고 각자 저녁과 아침을 준비하고 식탁에 앉아 각자 준비한 것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좀 전에 그녀의 하우스 메이트가 부엌을 어지럽힌 채 며칠을 치우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 말하지 않고 참았다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 말이 이 만큼 차 올랐는데 참았어.” 라며 손을 머리 꼭대기에 갖다 댄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적을 하면 아무리 좋게 말해도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함께 살면서 그런 건 말해야 하지 않나?”
“아니, 말을 하면 나중에 나한테 그대로 돌아오더라고. 예를 들어, 스터디 그룹의 한 멤버가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 약속 좀 잘 지키자고 말하잖아, 그럼, 나중에 내가 늦게 되는 일이 생기면 친절한 대접을 못 받는 것과 같애. 그걸 최근에 알았어. 그래서 오늘 꾹 참았는데 잘한 것 같아.”
“부엌이 더러우면 위생상 안 좋을 텐데.”
“그렇지. 그래도 거기에 물건이 쌓여있다고 내가 해야 할 것을 못하는 건 아니야. 그냥 내 기준과 취향에 맞지 않을 뿐이야. 남을 나한테 맞추려고 하면 곤란해진다는 걸 알았어.”
“우와, 대단하다. 그걸 알기에는 아직 어린 나인데. 난 한참 늙어서 알았는데. 울 딸 아주 훌륭하다.”
“실천한 지 이제 이틀 됐어. 헤헤”
택배가 배달되었다며 딸이 물건을 들고 들어 올 때까지는 모든 대화가 아름다웠다.
다음 달에, 결혼하는 영국친구와 브라이드 메이트들이 모여서 파티를 하는데 그때 사용할 파자마와 핸드백, 신발이 배달되었다며 입어보고 걸쳐보며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그 잠옷은 여름에 입으면 되겠네. 이쁘다."
"안돼. 천이 싸구려야. 못 입어. 그날 하루 입으려고 산 거야."
여기서 나의 숨어있던 자아 하나가 튀어나온다.
내 안엔 간혹 상황파악에 미숙해서 말을 툭툭 내뱉는 범생이 자아가 하나 있다. 그는 패스트 패션을 혐오하고, 쇼핑을 기피하고, 싸구려를 처단하고 싶어 한다. 결국 지구가 어떻고, 환경이 저떻고, 정신 차려야 한다며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체적으로 컨트롤이 안된다. 이 경우 범생이와는 거리가 먼 딸도 만만치 않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용호상박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늘 내가 밀린다.
"엄마는 20대들의 삶을 몰라. 요즘은 다 이래. 난 아주 양호한 거야. 다들 레이저 제모하고, 속눈썹 파마하고, 비싼 젤네일하고 알바해서 옷 사는데 다 쓰고 그래. 난 그런 거 안 하잖아. 엄마처럼 안 꾸미고 살기를 바라면 안 돼. 나도 패스트 패션 싫어. 그런데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내가 알바해서 아껴 쓰는 거야. 난 이 정도는 하고 살 거니까 내가 하는 일에 앞으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알겠지."
딸이 이렇게 쌔게 나오면 이 범생이 자아는 삐딱해지는 신공을 부린다.
"왜~?"
그러자 입을 다문 딸이 잠시 쳐다보더니 화면에서 사라졌다.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우린 자주 이렇게, 하던 대화를 끝내곤 했다. 유치하게시리.
가끔은 나도 그런다. 아마 나한테 학습된 것 같다. 이런 일이 생기면 둘 다 기분이 꿀꿀해지는 건 당연하다. 주로 답답하고 어색함을 참지 못하는 둘 중 하나가 대화를 시도해 왔다. 딸의 불만은 늘 비슷했다. 엄마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에 대한 인지력이 떨어지고, 진지함이 없고, 장난스럽게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말로 따지고 싸우는 것을 잘못한다. 아니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그냥 손을 놓아 버린다. 여기서 문제는 그래서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늘 하던 습관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이번에도 "왜~?"라고 장난스럽게 묻지 않고 "그래~."라고 했으면 깔끔하게 끝났을 것이다. 습관은 참 무서운 것임에 틀림없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은 딸은 어땠을까. 또 다른 깨달음의 시간이 있었을까.
오늘 저녁을 먹으며 페이스톡을 해보았으나 받지 않았다. 과제 때문에 바쁠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이런 소모전은 끝내고 싶은데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번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것임을 안다. 사는 것이 기계 돌아가듯이 모드를 바꾼다고 착착 맞춰 돌아가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소모전으로도 여기지 말고 그럴 수도 있는 삶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이자. 살아온 삶이 있고, 계속 살아가는 한,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질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데 어쩌겠는가.
여려서 나의 엄마가 나한테,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래, 너도 나중에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한 번 당해봐라."
만약 내 기억이 맞다면 엄마의 '염원이었을 리 없는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그래, 너도 나중에 너처럼 예쁜 딸 낳아서 잘 해결하며 살아봐. 그냥 그렇게 사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