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를 끝내고 1학년들에게 영화 ‘Holes’를 보여주려고 학습지와 함께 준비하고 있는데, 복잡한 표정을 가면처럼 쓰고 두 남학생이 찾아왔다. 다소곳하면서 절박함이 묻어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설명한 용건은 이렇다.
지난달부터 반별 축구대회가 진행 중인데 마침 자신의 반 시합이 있던 날, 기온과 자외선 지수가 너무 높아 체육과에서 축구대신 실내에서 피구를 시켰단다. 동아리 축구반 친구 두 명이 포진하고 있어 강력한 우승 후보였는데 한 판의 피구경기에 지는 바람에 결승전에 올라가지 못했다. 영어단어 시험을 치겠다 해 놓고 중국어단어 시험을 친 격이란 생각이 들면서 바로 공감 모드로 들어갔다. 어떻게 축구를 피구로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억울할만하다. 다른 한 반은 조금 전 1교시에 준결승전을 했는데 승부차기로 지는 바람에 아쉬움이 머리끝까지 차 있는 상태였다.
즉 두 반 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라 자기들끼리라도 축구를 해서 아쉬움과 억울함을 풀고 싶다는 사연이다. 그 말을 하는 표정에서 살려달라는 애절함이 절절했다. 한 마디로 두 반이 한 판 붙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반끼리 붙어서 뭐가 해결되는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가슴의 응어리를 풀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살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쉽게 허락하면 재미가 없으니, 체육과에 운동장 사용 허가를 받고, 모든 학생이 운동장에 나가는 조건을 걸었더니, 이미 다 해두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매 학기 반대항으로 배드민턴, 탁구, 축구 경기를 한다. 그중 축구인기가 단연 최고다. 여학생이 10분 , 남학생이 20분 동안 경기를 해서 득점을 합하는 방식이다. 주로 점심시간에 하는데 응원전이 볼만하다. 특히 여학생이 공을 몰고 가거나 골을 넣으면 남학생들의 함성 소리는 동네가 떠나갈 정도다. 오늘 여학생들은 남학생만큼 사무치지 않았는지 뛰지는 않고 응원만 하겠다 했다.
모처럼 비가 그친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폭염주의보를 증명하듯 아침부터 후텁지근했지만 선수들은 결기에 차 있었다. 연두색과 오렌지색의 축구화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한 녀석의 축구화 양쪽 끈이 풀어져 수염처럼 늘어져 있기에 묶으라고 했더니 "스타일이에요."라며 한 마디 던지고 뛰어갔다. 별 스타일이 다 있군, 저러다 밟으면 넘어질 텐데, 생각했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스타일로 인정했다.
선수들은 국가대표를 무색게 할 정도로 잘 뛰었다. 발재간을 뽐내며 공을 뽑아내었고 현란한 발놀림으로 상대를 요리조리 피하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멀리서 봐도 얼굴에 땀이 번들거렸다. 까만 종아리의 근육도 반들거렸다. 따가운 태양 아래 하얗게 반짝이는 운동장 모래 위에서 자신을 불사르고 있었다. 원도 한도 없게 뛰어다녔고 역시 우승 후보반이 몇 골을 더 넣어 이겼다. 그러나 이기고 지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뛰고 싶은 만큼 뛰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된 것 같았다. '나 원래 이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소리치며 가슴을 다시 펴는 일이었다. 축구공을 찼던 아이나 응원하며 소리 질렀던 아이나 그 확인이 중요했었던 거다.
손을 씻고 있는데 경기에 진 반 학생 하나가 수돗가로 다가와 말했다.
"샘,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마음이 좀 풀렸어?"
"네, 완전 다 풀렸어요. 완전 행복해요."
아까 절박한 얼굴로 왔었던 축구부 녀석도 따로 와서 인사를 했다.
"샘, 감사합니다."
"기분이 나아졌어?"
"네. 이제 다 괜찮아요."
1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었다. 축구 한번 뛰게 해 주고 인사를 거하게 받았다. 아이들은 이리도 쉽게 회복이 되는구나. 그런데 그것을 못해주는 경우도 참 많겠구나. 반성도 되었다. 머리로 하는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건강해야 한다. 언제나 아이들의 눈빛을 잘 읽어줘야겠다. '이만큼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으로 충분한, 건강한 보통 아이들도 잘 돌봐줘야겠다. 살다보면 말도 안되게 억울하고 가슴 답답한 일을 많이 겪을텐데 그럴때마다 오늘처럼 잘 풀고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매미가 울기시작한 오늘 하늘이 너무나 이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