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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 Mar 07. 2024

내 분노는 어찌 이리 찌질한지

마른 이들을 위한 항변(1)

어려서 내 별명은 와라바시였다. 와라바시가 일본말로 나무젓가락인데 그때는 그 말을 많이 썼다. 내 외모를 두고 짓궂게 놀리며 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주로 조무래기 머슴애들이 몰려다니며 하던 짓이었다. 나는 그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키가 컸으니 들을 만도 한 소리였다. 그런데 얼마 전 와라바시의 한국말 버전을 기습적으로 들었다. 다 커서, 아니 컸다고 하기에도 겸연쩍은 나이에.

 

밤새 나뭇가지가 부러지도록 내린 눈이 해가 나면서 금방 녹아버리던 어느 날, 지방에서 열린 모 워크숍에 참석했다. 다들 아는 얼굴들이라 쉬는 시간에 차를 마시며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외투를 벗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한 구석에서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 있었는데 그때 줌 회의에서 종종 만났던 낯익은 얼굴이 웃으며 다가왔다. 나도 눈으로 인사하며 웃어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와 나무젓가락이다.”라며 내 옆으로 지나갔다. 무해하게 웃으면서. 유해한 날벼락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잠시 ‘얼음’이 되어 서 있었다.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뒤따라가서 따지고 묻는 행동은 애초에 하지 못하는 성격이고. 그저 50년 전의 내가 되어 잠시 서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지나가던 친구가 뭘 혼자 웃고 있냐고 물었다. ‘OO이 나보고 나무젓가락이다, 그러더니 가버렸어. “ 한발 물러나 아래위를 훑어보며 ”나무젓가락 맞네.” 하더니 그녀도 가버렸다. 우 씨! 아무 일도 없이 행사는 잘 끝났다.

 

벌써 몇 주가 지났는데 내 속에서는 여전히 그날이 끝나지 않고 자꾸 비집고 나온다. 은유작가가 글쓰기 상담소에서 글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랬다. 시간이 지나도 나가지 않고 내 속에 계속 남아있는 소리, 느낌, 감정을 잡고 솔직하게 물고 늘어져 보라고, 그곳에 글감의 광맥이 있다고. 아하! 난 내 감정을 물고 늘어져 본 경험이 있긴 한가? 사실 많다. 그런데 끝은 늘 같았다. 글이 되거나 말이 되기 전에 내 속에 슬그머니 감췄다.

 

그래서, 오늘 한번 글로 물고 늘어져 볼까 한다. 솔직히, 이걸 말로 하거나 글로 쓰자니 먼저 창피하다. 내 몸매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지만 이 나이에 여전히 ’ 유치한 ‘ 감정이 올라온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럽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긴 했다. 키는 크지, 비쩍 말랐지, 피부는 시커멓지, 볼륨이 없으니 정장 교복을 입히면 볼품도 없었다. 한 번도 이쁘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가끔 잘 생겼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 고운‘ 여학생한테 할 소린가.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교복을 벗어나면서 나의 진가가 드러났다. 훤칠하지, 날씬하지, 까무잡잡하지. 뭘 입혀도 모델 같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다. 하물며 ’ 불여우‘라 불리기도 했다. ’ 불란서 여배우‘라나 뭐라나. 아이참! 그렇게 살아오다가 오랜만에 잊고 있던 ’ 나무젓가락‘ 소리를 들어서 충격을 받은 것인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기분이 나빴던 거네. 엄마, 화난 거야.” 내 사설을 들은 딸이 툭 던졌다. 돌멩이 하나가 가슴에서 떨어져 나왔다. 맞다. 기분 나빴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건 말건 기분이 나빴다. 21세기에 누가 외모 가지고 이야기를 하며, 그것도 부정적인 표현을 면전에서 한단 말인가. 이래 봬도 왕년엔 불여우였다고. 나도 이 몸매로 사느라 얼마나 힘든지 아냐.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부러워서 그랬을 거란 위로는 2차 가해다.(아무도 위로하진 않았음) 가슴에 숨겨둔 말을 꺼내 발산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근대, 왜 기분 나쁘단 말을 안 했어? 왜 그런 말을 못 해. 그러곤 혼자 꿍꿍 앓고.” 딸이 돌멩이를 내 가슴에 도로 던져 넣었다. 그게 잘 안된다. 그 자리에서 했어야 했는데. 불편했음을 알려는 줬어야 했는데, 그걸 못해서, 한 많은 처녀 귀신처럼 몇 주째 내 속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그나저나 난 왜 아직도 이런 찌질한 걸로 분노하는지 화가 난다. 그 많던 정당하고 올바른 분노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런 시시껄렁하고 유치한 분노만 남았는지. 

 

공소시효가 지나 이제 와서 말하기는 김이 샐 뿐 아니라 잘못하다간 개그가 될 것 같다. 다음에 만나면 아무도 모르게 발을 살짝 걸어서 넘어뜨릴까 싶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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