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렌타인 30년, 누가 들고 오려나

정지아작가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에 붙여 한 편 더

by 오드리

‘나는 입 안에 든 시바스리갈, 그러니까 위스키 한 모금을 오래도록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그날 처음으로 30년간 나의 일부였던 식도와 위의 위치와 모양을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위스키가 훑고 간 자리마다 짜릿한 쾌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나는 젖 먹는 송아지처럼 자꾸만 입술을 핥았다.’ (p.35)

정지아작가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홀짝홀짝 들이키다가 이 부분에서 불쑥 ‘발렌타인즈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에이지드 써티 이어즈’가 생각나 입술을 핥았다. 통상 ‘발렌타인 30년’(이하 발삼)이라 부르는 그 술 말이다. 녀석은 시바스리갈이나 여타의 위스키처럼 ‘식도와 위의 위치와 모양‘ 따위를 ’체감‘시키지 않는다. 난 술을 못 마시는 데 목에서 성대를 치고 식도로 내려가는 찌릿한 느낌이 치가 떨리게 싫다. 나한테는 소주나 위스키나 매한가지다.

발삼은 다르다. 녀석은 혀에 닫는 순간 액체가 연기가 되어 혀의 돌기 사이를 휘돌아 가슴과 팔로 스며들어 버린다. 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목넘김 자체가 없다. 이럴 때, 기다리던 애인을 만난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핥는다. 기습 키스의 여운을 맛보듯이. 엄지를 들어올리는 순간 공중부양이라도 할 것 같아 등을 뒤로 기대게 된다.

“내가 요즘 발렌타인 30마저 못 마셔.”

“왜?”

“언놈이 사줘야지 마시지.”

이런 농담을 종종 하는데, ‘언놈’이 사줘서 마신 적은 없다. 공무원 월급쟁이들이 사 마실 가격이 아니다. 학교 부장들 회식 자리에 새로 발령받은 교장샘이 들고 와서 한 잔 홀짝여 봤고, 동생이 아버지 드린다고 가져온 걸 옆에서 몇 잔 얻어 마셔 봤다. 그때 맛본 신세계는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술 이야기만 나오면 모든 술을 다 섭렵하고 더 이상 마실 술이 없는 듯 열 번을 토하게 만들었다. 술 권유를 받으면 발삼만 마신다며 비싼 척 튕겨보게도 했다. (지금도 써먹고 있다)


그러다 결국,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남녀공학인데 남녀 학생들을 분리해서 반을 배정하던 ‘야만적’인 시절에, 그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아무도 남자반 담임을 하지 않겠다고 하길래 손들어 자원했고, 내 평생 고생이란 고생은 몰아서 다 해 본 한 해였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다 부모들이 만든 스트레스를 온 몸으로 받아내느라 세상과 박자를 못 맞출뿐이었던거지. 여하튼 머리에서 호르몬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남학생 30여명을 데리고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아이들이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릴까 교사들은 노심초사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가방을 검사할건지, 학생인권에 위배되지 않는지, 답도 없는 회의를 계속하고 있던 차였다.

맨날 엉뚱한 생각으로 가득찬 내 머리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 올랐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각서를 쓰게 한 것이다. 내용은 아마 이랬을 거다.


‘나 00이는 이번 수학여행에서 절대 술을 가져오지도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졸업 후 담임선생님께 발렌타인 30년을 _____병 사다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사인을 하고 지장도 찍게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발삼은 반드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하라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무지 비싸기 때문이라고. 17년이나 27년은 안된다고 못을 박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황당해하면서 (순진하게도) 빈칸에 숫자를 적어서 제출했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주도면밀했던 점이 있는데, 영수증처럼 잘라서 아이들도 하나씩 가져가게 했다. 담임들이 독재를 부리던 시절이 있었다. 미안하다.

대부분 아이들이 한 두병을 적어 냈는데, 어떤 녀석은 열 병을 적어내기도 했다. 아쉽게도 누군지 기억엔 없다. 한동안 그 쪽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훗날 언젠가 누구라도 발삼 한 병을 들고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다 쪽지도 없어지고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도 잊고 살았다. 아마 이제는 30 중반이 넘었을 그 아이들은 자기 몫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해 수학여행에서 교사들은 기어이 가방 검사를 했고, 몇 병의 소주를 압수하고 여행은 무사히 끝났다. 나중에 아이들한테 들었는데 몇몇이 수퍼에서 몰래 사다가 밤새 마셨다고 한다. 얼마나 짜릿하고 즐거웠을까. 혹여 그중에 양심있는 녀석이 영수증 반쪽과 함께 발삼을 들고 나타난다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될 것 같다. 그 술 맛은 과연 어떨까. 진짜 공중부양 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여담인데,〈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읽다가 발견했다. 발삼보다 더 비싼 술이 있다는 것을. 로얄살루트 38년은 들어 본 것 같은데, 멕켈란 1926은 듣도 보도 못한 술이다. 발삼이 최고인줄 알고 있던 나는 신논현역 가는 9호선에서 책에 코를 박고 있다가 살짝 오기가 생겼다. 멕켈란 1926은 한 병당 6억 5000만원까지 가는 한정판으로 내 인생에 맛볼 기회는 없으니 쉽게 포기가 되는데, 로얄살루트 38년은 발삼의 맛을 아는 (술은 못하지만) '술 미식가'로서, 언젠가 맛보고 싶다는 만만한 욕망이 자리 잡았다. 어느날 '언놈'이 뿅 나타나 사줄 것 같지는 않으니 '돈'을 벌어야겠다, 결의를 다지며 허리를 펴고 눈에 힘을 주었다. 로얄삼팔, 너 기다려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