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수 있어진 가라한 아사는 웃을 수도 있게 되었다

눈물과 웃음은 이어져있다

by 윤지원

여기는 카페 <종달리 746>. 종달리라는 이름에서부터 마음이 뽀송뽀송해진다. 종달새가 떠오른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카페 책장에 있는 책을 보니 이곳이 더 좋아진다. 내 취향을 읽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작은 동백꽃, 아기 조개 반지, 1cm 가족등반 뱃지, 직접 그린 수채화 엽서 등의 소품을 구경한다. 나무 그대로의 무늬가 살아있는 편안한 테이블과 푹신한 좌식 소파가 깔린 구석 공간. 넉넉한 쿠션을 보며 마음이 노곤노곤 해진다. 왠지 이 곳에서는 조금 더 안전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 무작정 글을 쓰러 왔다.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넣은 묵직한 가방을 메고. 마음 깊은 곳 어딘 가에 가시가 박힌 듯 물길이 막힌 듯, 납 덩이를 허리에 매달고 물속에서 떠오르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은, 이 답답함의 본질을 만나기 위해서.


문득 김혜린 작가의 <불의 검> 속 가라한 아사가 생각난다. 막내아들이었던 그는 철검을 쓰는 카르마키 족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형들과 여동생 그리고 부족의 많은 수를 잃고 8살에 푸른 용부의 수장 전사로 살아야 했다. 그는 아파도 슬퍼도 두려워도 울 수 없었다. 그를 보는 수많은 의미의 시선 틈에서 인간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순식간에 푸른 용의 전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울지도 웃지도 않게 된다. 목동이 되고 싶었던 정 많고 눈물이 많았던 소년 아사는 어디로 갔을까.


난 단숨에 자라야 했다
비웃음이나 멸시보다 더 무서웠던 그 기대
난 이를 악물고 내 피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쓰려오는 등짝을 구부려 밤새 소리 죽여 울다가
해가 뜨면 더욱 태연한 얼굴로 난 또 뛰고 굴렀다
울음을 멈추니까 웃음도 멈추었다
- <불의 검> 가라한 아사 -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편히 웃을 수 없었다. 웃음이 얼굴에 떠오르는 순간 느껴지는 죄책감과 미안함, 당혹스러움으로. 누군가가 가족을 떠나보낸 직후에 웃는 모습을 보면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웃음이 나오나?’ ‘별로 슬프지 않은가 봐’. 그 생각들이 유리 칠한 가시가 되어 나를 향한다. ‘어떻게 웃을 수 있지?’ ‘별로 슬프지 않은가?’ ‘돌아가신 분이 불쌍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볼까 봐 나는 순간순간 찾아오는 찰나의 소소한 기쁨을 외면해야 했다. 웃음을 머금었다가 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너무 슬프고 아프고 그리운데, ‘나는 슬퍼하고 있다고, 아픈 것이 맞다고’ 내 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내가 나에게 가장 하고 싶은 메시지, 강의 엔딩으로 함께 낭독하는 ‘무엇을 해도 무엇을 하지 않아도 존재가치를 증명해내지 않아도 나는 있는 그대로 온전히 귀하고 소중하다.’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워도, 나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나는 여전히 힘들다.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강한 욕구가 균형을 잃으면 ‘가치 없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덫’을 밟게 된다.


누워있으면 옆으로 흐르는 눈물이 눈을 따라 코를 지나 베개를 적신다. 엄마를 잃은 '나의 엄마’의 처절한 슬픔이 심장을 헤집는다. 미래의 내 슬픔을 미리 당겨와서 아파한다. 언젠가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내가 맞을 감정들이 파도처럼 다가와 나를 덮친다. 감당할 수 없는 먹먹함이 심장을 쥐어뜯는 듯 답답하다. 그럼에도 이 순간 나는 나를 위해 산다. 엄마가 내 곁에 오래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를 위한 마음이다. 어느 한순간 이기적이지 않은 때가 없다. 그래도 나는 계속 이기적이기로 한다. 앞으로도 나는 나를 위해 살 것이다. 엄마에게 잘하는 순간도, 내 마음을 접어야 하는 순간도,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시도는 모두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엄마가 건네는 ‘나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기꺼이 받는 것은, 내가 받아 갈 때 엄마가 기뻐하고, 나는 엄마가 기뻐할 때 내가 행복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표현할 대상을 잃은 감정은 고통이다. '볼 수는 없지만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는 것'과 '원천적으로 가능성이 없어져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은 0과 1만큼 멀다. ‘엄마를 그리워하고 아파하는 나의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 내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을 엄마가 알 수 있도록 그냥 있는 것. 멀리에 있어도 곁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마음이 건강하지 않거나 약해있을 때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어야 곁에 있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어디쯤에 있으면 곁에 있는 것으로 엄마가 인식하고 안심할지 가늠 중이다.


돌아가시기 전, 외할머니는 집중치료실에서 목사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만나셨다. 천국에서 만날 소망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정말 기쁘다고 엄마를 위로하고 나를 다독였다. 그래서 나는 웃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국 소망이 있으니 마음이 놓이고 기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며 깨닫는다. 나는 정작 나를 위로한 적이 없다는 것을. 나의 상실감, 슬픔, 아픔, 괴로움, 후회, 미안함, 죄책감을 제대로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외면하고 있었다. 너무 힘들 테니까. 아픈 건 싫으니까. 나는 감정코치니까. 전문가니까. 이런 감정 정도는 잘 소화시켜서 흘려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누구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겁이 많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다. ‘우리 가족을 지키고 싶다' '방패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양손에 몸보다 더 큰 무기를 든 내 안의 위태로운 여린 내가 보인다. ‘강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는 '약한 것은 옳지 않다, 잘못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약하고 여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한다. '윤지원, 많이 힘들었겠다. 외로웠겠다.'


카페 밖에 커다란 손수건으로 두건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 낙엽을 쓸고 있는 할머니 두 분이 보인다. 갑자기 눈이 뜨거워진다. 제주도 시골마을 종달리에서 외할머니가 보고 싶은 어린 외손녀가 이제야 운다. 그리움이 사무쳐 운다. 나를 위로하며 운다. 한참을 울고 습기 머금은 바람을 맞는데 가슴이 후련하다. 소리 내어 웃어보았다. 김혜린 작가의 <불의 검>에서 ‘울 수 있어진 산마로, 가라한 아사는 웃을 수도 있게 되었지.’ 이 문장을 이제 이해한다. 속울음을 꺼낼 수 있는 힘이 생기면 편안한 웃음이 뒤따라 온다. 눈물과 웃음은 이어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