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며 깨달은 것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다/시간은 유한하다

by 윤지원

내가 여행하며 깨달은 것 하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것.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58시간 이동하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이르쿠츠크에는 바이칼 호수가 있는데, 이르쿠츠크 터미널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버스로 약 8시간이 걸린다. 바이칼 호수 정류장에서 바지선을 타면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섬인 알혼섬에 내려준다. 샤머니즘이 남아있는 듯한 후쥐르 마을의 니키타 하우스에서 일주일을 보낸다. 자전거를 빌려서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는데 검은 러시아 개떼가 동네를 활보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바다 같은 바이칼, 울긋불긋한 천들이 가지마다 묶여있는 큰 나무들, 태양과 지구 사이가 뚫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청량한 하늘. 알혼섬에 대한 이미지다.


이르쿠츠크로 돌아와서 이제 한국행 비행기 티켓팅을 해야 하는데. 나를 위한 좌석 하나는 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새벽 일찍부터 공항에 가서 대기하는데 없단다. 종일. 한 자리도. 어쩌지!!! 오늘 못 가면 비자 만료라서 불법체류가 될 텐데! 발을 동동 구르며 창구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으니 불안이 몰려온다. 불법체류가 되면 어쩌지? 비자 연장을 위해 대사관에 가야 하는데 서류는 뭘 가져가야 하나. 오늘은 어디서 자야 하나. 러시아 루블화가 얼마나 남았더라. 한국에 갈 수는 있는 걸까. 어디서 뭘 먹지.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 어디에서 자고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나 자신이 신기하다.


새벽부터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몇 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한테 어디론가 급하게 가자고 한다. 티켓이 생겼다는 말로 알아는 들었는데 가는 방향이 조금 이상하다. 나 체크인을 안 했는데 왜 공항 검색대 안을 통과하지?? 그것도 승무원과 기장이 지나가는 곳으로?? 차를 타라고 한다. 승용차를 타고 공항 활주로를 달려서 내리니 저쪽에서 계단차가 가까이 오더니 지잉 하고 계단이 탑승구로 올라간다. 비행기 문이 열린다. 분명 비행기 바퀴 굴러가는 거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그리고 나 보딩패스도 없는데!! 32kg짜리 캐리어는 그냥 들고 타?? 출발하는 비행기를 세워 탑승하니 모든 승객들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쟤는 도대체 정체가 뭐길래?? 심지어 캐리어도 들고 올라와?? 네, 저도 많이 황당하거든요.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어찌 내게. 그리고 분명히 화면 속에 한국행 모든 시간대 좌석 0개인 거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세상에, 기내 정 가운데 라인에 딱 한 자리 비어 있다니.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면 나도 못 믿을 이 신기한 경험을 하고 나니 깨닫게 된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구나, 그리고 어디에나 솟아날 길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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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ixabay.com


내가 여행하며 깨달은 것 둘.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


착륙 몇 시간 전, 갑자기 기체가 흔들리다가 체감상 20미터 이상 뚝 떨어졌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난기류를 지나는 것이 처음이 아닌데, 이 순간, 고압전류가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붙잡아 둘 수도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부모님이 먼저 가실 수도 있다는 인식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정말 중요한 것을 미루는 이면에는 '시간은 무한하고 언제든 기회가 있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동시에 또 한 가지를 깨달아 버렸다. 적어도 나에게 시간은 유한하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후로 나는 부모님 생신에 바쁘다는 핑계로 선물을 보내고 적당히 때우는 것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할 때 의식 같은 질문을 한다. "이 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 해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인지?" "이 순간이 마지막이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인지?" 나는 매 순간 깨어있지는 못해서, 때로 후회하는 결정을 하기도 하지만 그 결정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간이 유한하다는 깨달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 에너지도 한정적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나에게 허락된 유한한 시간과 에너지를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내가 결정하는 많은 순간 지혜로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 끌려가는 인생이 아닌 내가 이끄는 주도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시간의 유한성을 인식한 후에 아주 가끔씩 잠들기 전에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그것이 죽음인데 내일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크리스천인 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하다 싶지만, 드물게 거대한 공포감이 드리우는 밤이 있다. 그런 밤을 지나고 아침이 되면 눈을 뜨자마자 감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다. ‘아, 내가 살았구나. 살아서 오늘을 누릴 수 있게 되었구나.’ 간혹 강의할 때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청소년들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한 친구는 “선생님, 인생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사시면 안 돼요!”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나도 알고 있다. 나도 10대와 20대에는 시간이 내 편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많아서 넘칠 지경이며 팔아서 돈으로 바꿀 수 있다면 너무나 당연히 그렇게 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이 말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벌벌 떨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식하며 현재를 잘 살아내고 싶다. 지나간 것을 후회하며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지금을 흘려보내는 것은 유한한 시간 속을 잠시 머물다 가는 인간에게 사치이지 않을까? 10년 후 지금 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어떤 후회를 할까? 무엇이 가장 아쉽고 아까울까? 무엇을 뿌듯하고 잘했다고 생각할까? 지금은 20대의 인생 속도와 비교하면 많이 느리고, 성과를 내고 있는가에 대한 약간의 불안함이 있지만, 비교하지 않기로 한다.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 수 없고 내가 겪는 어떤 경험도 쓸 데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한한 내 시간의 소중함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 윤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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