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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원 Feb 26. 2021

인문학 강사의 고민

칸트, 헤겔, 데리다, 로도윅과 함께


인문학 강의의 주제는 다양하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다. 삶, 죽음, 행복, 불행, 용기, 관계, 관점 등 사람에 관련된 키워드가 모두 주제가 될 수 있다. 강의 의뢰가 오면 어떤 주제는 반갑고 어떤 주제는 불편하다. 그동안 강의를 하면서 생각했던 고민에 대해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자크 데리다,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사상을 빌려 풀어보려 한다. 완전무결한 철학자는 세상에 없으므로 어떤 부분은 지금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나에게 적용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가며 공부하고 있다. 나는 이들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타서 나의 고민과 관련된 부분을 연결해서 생각을 확장하려고 한다.


* 인문과학 또는 인문학(人文學, 영어: humanities)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로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

출처 위키백과


칸트는 근대철학의 문을 열었다. 칸트 이전과 이후는 극명한 차이가 있어서 거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칸트 이전에는 대상과 주체에 대해서 말할 때 대상이 있고 주체는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사과가 사과 모양이니까 사람은 사과를 사과로 인식한다는 의미다. 칸트는 여기에 의문을 가졌다. 대상은 실제로 어떤 모양과 색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서 인간의 인식 체계에 의해 그 대상(물체)을 표상으로서 인식한다는 것. 즉, 사과라고 불리는 대상은 인간의 눈에 사과로 보이기 때문에 사과인 것이지 실제로는 어떤 모양과 색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칸트의 시선을 조금 확장시켜보자.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대상은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체계가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세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계는 인간인 이상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보편성을 갖는다. 태어날 때부터 세팅된 기본값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역과 문화, 시대에 따라 그리고 개개인에 따라 아름답다고 느끼는 인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식할 수 있는 만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아름다움을 느끼는 스펙트럼이 좁은 사람과 넓은 사람이 보는 시선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중요한 만큼 인식체계에 오류가 있다면 대상을 왜곡해서 볼 수 있다. 한 대상 혹은 사건을 바라볼 때 어쩌면 사람 수만큼의 다른 시선이 펼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객관적으로,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보통,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 앞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헤겔은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헤겔은 변증법 논리 전개로 유명한데 아름다움을 보는 시선에 있어서도 정, 반, 합의 변증법으로 접근했다. 헤겔에 의하면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아름다운지(정) 아름답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반) 따져보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것에 도달(합) 한다. 합은 늘 합에 머물지 않는다. 합은 곧 정이 되어 다시 정, 반, 합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변증법은 한쪽으로 치우치려는 의식을 정돈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마치 하브루타에서 하베르와 함께 바꿔 말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 찬성의 입장과 반대의 입장을 모두 취해보는 것. 스스로가 정과 반을 정립할 수 있다면 생각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칸트와 헤겔은 모두 독일 관념론을 따른다. 관념론은 약간은 말장난 같기도 하고 당연한 말을 한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를 읽고 있으면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그다음 단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허공에 뿌려진 말 같은 공허함도 느껴진다. 그래서 철학의 씨앗을 현실에 심고 가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멀리 하늘 위에 둥둥 떠있는 것 같은 형이상학적인 말들의 거품을 제거하고 그 안의 알맹이를 솎아서 어떤 땅에 맞을지 분석해야 한다.


 작업을 위해서는 차이에 집중했던 자크 데리다 필요하다. 영어로 문어와 낙지는 모두 octopus. 그래서 영어권 사람들은 낙지와 문어의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차이를 선명히 하고 범주를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있는 예이다.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문학과 철학, 예술과 건축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관계 속에서 어떤 차이를 드러내는지 잘게 자르고 토막 내며 범주를 확실히 하려고 했다.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은 칸트를 보는 데리다에 대해서 논리를 펼치며 예술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고 한다. 과연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예술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과연 맞는지 생각해 보자고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예술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오염되고 있으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로도윅은 그렇다면 순수예술이라는 이름을 입고 지구상의 많은 문제점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욱 시대정신을 담아 목적을 담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더욱 당파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질문한다.


나는 로도윅의 말이 현실에서 뚝 떨어진 곳에서 무릉도원을 만들어 그 안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을 말하고 즐기는 것을 경계하자는 말로 들린다. 아름다움을 보는 시선을 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감각을 잃지 않으며 균형을 맞추는 것, 예술가뿐 아니라 감상자와 그것을 2차로 다루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의식이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힘들다. 그것을 보는 것도 그로 인해 생긴 감정을 다루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크다. 외면하면 당장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외면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후퇴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이 모여 거대한 후진 장치가 된다.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영역들을 현재로 끌어와서 적용하고 오류를 개선하며 시대를 견디며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같이’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을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임무이지 않을까? 인문학 강사로서 늘 고민하는 지점이다. 불편한 이슈는 피하고 밝은 면을 다루면 누군가와 부딪힐 일도 불편할 일도 없다. 하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다.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을. 그래서 불편함을 딛고 앞으로 걸어 나가기로 결정하고 나면 자신의 가치관을 먼저 점검하고 나에게 오류는 없는지 어떤 편견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이슈와 관련 있는지 촘촘하게 연구해야 한다. 세상과 만나는 나의 경계가 깨끗한지 일그러지지는 않았는지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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