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2
한 달에 한 번,
진통제 없이 견디지 못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
의지로 인내할 수 있는 성격의 아픔이 아니다.
독일에서 사 온 강력한 진통제를 먹어야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다.
신기한 것은, 너무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있는 그 순간에
‘내가 살아있구나’
실감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고민하고 의심하는 순간의 ‘나’도,
아파서 무기력할 정도로 몸을 말고
바닥에 붙어있는 순간의 ‘나’도 살아있다는 증거다.
죽지 않고 살아있기에 내가 이 고통도 느낄 수 있으니
그 자체로 감사하다.
끝이 있는 고통이기에.
그리고 내가 아직
엄마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은 내가 깨어있도록 돕는다.
살아있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있게 한다.
바칼로레아 문제 중 하나가 떠오른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타인의 눈으로 볼 때는 가능해 보일 지 모르나
나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 한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들,
이를테면 아픔, 슬픔, 고통을 느끼는 순간들로 인해
행복을 인식할 수 있기에.
행복한 순간의 지속만으로는
행복을 인식하기 힘들지 않을까?
영화 <꾸뻬씨의 행복여행> 마지막 대사처럼
행복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슬픔, 고통, 공포, 두려움, 불안의 순간들을 통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알 수 있고,
결핍감을 통해 충만도 느낄 수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에서 말하는
상실이 주는 교훈의 의미가 떠오른다.
세공하기 전의 동글동글한 원석을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면으로 깎아서 빛을 받는 부분의 각도를 조절한다.
입사각에 변화를 주어 빛이 여러 방향으로 반사되게 하는데,
이것이 우리 눈에는 반짝반짝 빛나게 보인다.
모든 면적이 같은 각도로 빛을 받는다면 반짝일 수 없다.
내 인생이 하나의 보석이라면
나의 굴곡진 경험들이 나를 빛나게 하고 있을 것이다.
아프고 힘들었던 날들이
행복한 순간들과 더불어 나를 나되게 한다.
상실과 결핍은
나에게 무엇이 소중한지 명확하게 알게 한다.
시간이 무한하다고 착각하다가
문득 시간이 유한하다고 느끼는 순간,
내가 바라보는 관계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된다.
내일 먹을 음식이 없다면
오늘의 양식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내일 내가 살아있다는 보장이 없다면
오늘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영화 <이프 온리>에서처럼
매일 얼굴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내일부터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그것을 나만 알고 있다면?
이런 극단적인 가정들은
상상 혹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때로는 우리 삶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으며,
삶에는 예고가 없다.
늘 깨어 지금을 살아야 하는 가장 절박한 이유다.
어쩌면 사소할지도 모르는 몸의 신호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지금 깨어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