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게슈탈트 기도문
최근 무안함과 다시 마주했다. 꽤 건강한 마음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중이었는데. 무안함이 아직은 내가 소화시키기 힘든 감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내가 무안함과 마주했을 때 더 기분이 내려갔던 이유는 감정이 올라왔을 때 분명 불쾌하고 당황해서 손발이 차가워지는 반응이 일어나는 중에도 내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감정과 드러나는 표정의 불협화음은 꽤나 이상하고 또 슬펐다.
그 순간 공간의 분위기가 망가질까 봐 표현을 못했다. 공격받은 기분으로 내가 무안함을 드러낼 때 나 또한 공격하는 모습이 될까 봐 걱정이 되었고 그 이면에는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분들과의 모임에서 유난스럽고 까칠하다는 평가를 받을까 봐 두려웠던 것도 같다.
슬픔, 분노의 감정은 불편하지만 나를 해치지는 않는다. 이제는. 그런데 이 무안함은 수치심을 동반하며 나를 갉아먹는다. 사실은 존중받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토대가 되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존중은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온전하게 나를 돌보지 못할 때도 있다. 말한 이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물어보는 게 맞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그러고 나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혹은 나의 생각과 다르다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을 지키고 상대방도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결국 나의 무안함을 표현했다. 공격의 의도 없이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그리고 오해를 풀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불편함의 꼬리에는 ‘괜히 말했나?’ 혹은 ‘이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지면 어쩌지?’하는 생각들이 붙어있다.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사랑도 받고 싶은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당신이 그로 인해 나를 미워해도 감당하겠습니다’라는 의미도 포함하는 걸 텐데.
자신과 타인을 자연스럽게 분리하는 데에서부터 어른이 되나 보다. 프리츠 펄스의 <게슈탈트 기도문>을 마음에 새겨야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타인의 마음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잘 지내고 싶다. 마음을 나누며.
프리츠 펄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한다.
나는 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기대에 따르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만약 우연히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만약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