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다서영 May 08. 2023

직장 내 여우 퇴치자

짧은 이야기(소설)

"제가 해보겠습니다."

또, 시작이군. 은정은 손을 번쩍 든 유 성미 대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 대리가요? 지금 다른 행사도 맡지 않았어요? 그런데 ICT 박람회도 맡아서 하겠다고요?"

"네. 할 수 있습니다."

유 성미 대리는 예쁜 눈을 반달로 곱게 접으며, 대답했다. 은정은 재빠르게 새로 온 부장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부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자신감, 환영합니다. 그럼 한번 유 대리가 맡아서 진행해 보세요."

젠장, 은정은 속으로 쌍욕을 던졌다. ICT 박람회는 작년 은정이 마무리했던 행사. 하지만, 처음부터 맡았던 업무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유 성미 대리가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가, 과한 업무 부담으로 힘들어하는 유 성미 대리가 안타깝다고 당시 부장이 행사 중간쯤에 은정한테 일을 넘긴 것이다. 제대로 일을 해놓지 않은 유 성미 대리 때문에 은정은 주말 근무도 자처하며 일을 마무리했는데, 행사가 다 끝난 후에 칭찬은 유 성미 대리 차지였다. 직원들은 처음 손을 번쩍 들었던 사람만 기억하고, 일을 마무리한 사람 따위는 기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같은 꼴 나는 거 아니야. 나 지금 바쁜데.'

이번에는 직접 하겠다고 손을 들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은정은 지금 맡은 업무가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올라가는 손을 억지로 눌렀다. 그런데 새로 온 부장의 흐뭇한 미소를 보니 그냥 날밤을 새더라고 맡을 걸 하는 후회가 올라온다.


"유 성미 대리 또 손 들었네요. 작년처럼 은정 대리가 마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부서에서 유일하게 유 성미 대리의 여우짓을 알고 있는 김 대리가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솔직히 은정도  대리랑 같은 생각이었지만, "설마요. 그리고 맡기면 못한다고 말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김 대리가 은정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 꼴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 아직도 몇몇 사람한테는 인정머리 없는 사람 취급받는 거 몰라요?"

작년에 김 대리는 유 성미 대리가 넘긴 업무를 받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가, 과한 업무에 힘든 직원을 모른 척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잠시 소문이 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이후 김 대리의 적극적인 업무 태도에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김 대리에 대해 말할 때마다 반 농담조로 "인정머리 없는"이라며 말꼬리를 붙이고는 했.

"그때 가서 생각할래요."

"아까 부장의 흐뭇한 미소를 보니 이번도 전하고 똑같은  같아요. 솔직히 유 성미 대리가 여자가 보기에도 예쁘긴 하잖아요. 눈으로 애교 떠는 거 보면, 나도 여우짓인 거 알면서도 가끔 넘어간다니까요."

잘난 외모는 유 성미 대리가 가진 가장 큰 힘 중에 하나였다. TV에서나 볼 듯한 외모, 웃을 때마다 반달로 곱게 접히는 선한 눈매를 보고 있으려면, 화를 내려다가도 사그라드는 알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은정은 유 성미 대리의 미소에 넘어가지 않는 몇 안 되는 직원 중 하나였지만, 여자도 이런데, 다른 직원들, 특히, 남 직원들은 유 성미 대리의 말이라면 으로 된장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은정은 일어나지 않는 일은 깊게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유 성미 대리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은정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작년 패턴으로 보면 유 성미 대리는 조만간 부장을 회의실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부장은 곧바로 다른 직원들을 불러서 유 성미 대리의 업무를 떼어 줄 것이다. 그렇게 유 성미 대리가 하겠다고 한 업무는 다른 사람이 맡아서 하게 되고, 유 성미 대리는 가벼운 한 두 개 업무만 맡아서 열과 성을 다해 마무리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마무리했던 업무의 성과까지 다 가져갈 것이다.

은정은 위 패턴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은정 역시 과한 업무에 고생하는 유 성미 대리를 안타까워했었는데, 최근에 동기 모임 술자리에서 유 성미 대리가 하겠다고 한 업무들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손에 마무리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술에 취한 동기들이 짠한 마음에 유 성미 대리의 업무를 마무해 줬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유일하게 술을 마실 수 없어서 맨 정신이던 은정만 모든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유 성미 대리와 부장이 회의실로 들어간다. 은정은 온 신경을 회의실에 집중했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힘드네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 파리해 보이는 유 성미 대리가 촉촉한 눈가를 괜히 한번 건드리며, 부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정 유혜 부장은 유 성미 대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역량이 안 되는 거 아니면, 한 번 끝까지 해보는 건 어때요?"

정 유혜 부장의 말에 유 성미 대리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흘끗 쳐다본 정 유혜 부장은 꽤나 단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쉽게 넘어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유 성미 대리는 바로 "제가 박람회 쪽은 잘 몰라서, 역량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강 은정 대리가 이쪽 전문가라서 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역량이 안 돼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유 성미 대리는 찔끔했지만, 바로 특유의 예쁜 눈매를 곱게 접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배우면서 하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정 유혜 부장은 옅게 미소를 짓고는 "알았으니 나가보세요."라고 말했다. 유 성미 대리는 만족한 표정으로 일어나면서, 부장에게 말했다.

"강 은정 대리 불러올까요?"

"아니요. 먼저 나가세요. 필요하면 제가 부르죠."

"네."

유 성미 대리가 환하게 웃으며, 회의실을 나왔다.


유 성미 대리의 콧노래에 은정의 불안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유 성미 대리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야기가 잘 진행된 게 분명했다.

'누굴까? 누구를 부를까? 당연히 작년에 업무를 마무리했던 나를 부르겠지?'

은정은 회의실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곧이어 회의실 문이 열리고 부장이 나왔다. 그리고 은정과 눈이 마주쳤다. 젠장, 은정은 속으로 욕을 하며, 일어나기 위해 부스럭거리다가,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 모두 주목해 주세요." 라며 부장의 외치는 소리에 멈칫했다. 직원들 모두 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ICT 박람회 관련해서 유 성미 대리가 역량이 부족해서 업무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 맡아 줄 수 있는 분이 있을까요?"

생각지도 못한 부장의 말에 은정은 깜짝 놀라서 눈만 깜박였다. 유 성미 대리를 쳐다봤는데, 유 성미 대리 역시 놀랐는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입만 쩍 벌린다. 직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일이 많아서...", "저도 힘들어서." 등등 모기만 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순간 은정은 또다시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은정은 뭔가에 홀린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 제가 해보겠습니다. 작년에 한번 해봤던 일이기도 하고요."

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유 성미 대리가 강 은정 대리를 추천하던데, "

은정은 찰나의 순간 유 성미 대리를 노려보았다. 유 성미 대리는 아직도 멍한 상태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부장이 말을 이었다.

"역량이 부족한 직원을 대신해서 강 은정 대리가 일을 맡아 준다고 하니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ICT 박람회 행사는 강 은정 대리가 맡아서 진행하도록 하지요. 다들 ICT 박람회 업무 관련해서는 강 은정 대리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정 유혜 부장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직원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잠잠해지고, 은정은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유 성미 대리가 일을 못하겠다고 말을 했을 테고, (그런데 역량이 부족해서라고 했나 보군.)

그리고 나를 추천했고, (작년에도 나를 추천했겠군.)

부장이 그 사실을 직원들이 다 듣는 곳에서 말을 했고, (왜?)

마지막으로 직원들이 ICT 박람회 업무는 내가 담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건데, (이게 제일 중요! 한 사실이지.) 그나저나 부장님 설마?'


은정은 부장을 쳐다보았다. 부장은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전에 있던 부장들하고 똑같을 줄 알았는데, 뭐지?' 은정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그 순간, 작게 씩씩 거리던 유 성미 대리가 부장을 향해 조용히 가는 것이 보였다. 유 성미 대리는 부장 옆으로 가더니 뭔가를 속삭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은정은 온 신경을 부장의 입술에 집중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은정은 곧바로 유 성미 대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부장이 또다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당연히 직원들이 다 있는 곳에서 말해야지요? 유 성미 대리도 업무를 한다고 했을 때 직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말을 했던 걸로 아는데요. 유 성미 대리, 역량이 부족한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업무를 하겠다고 당당하게 손을 들던 자신감으로 역량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고 말해도 됩니다."

부장의 말에 유 성미 대리는 벌게진 얼굴로 재빠르게 자리로 돌아왔다.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 성미 대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처음 보는 험악한 얼굴로 은정을 노려보았다. 은정은 황당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마침, 부장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또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유 성미 대리, 강 은정 대리한테 업무 인수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까 박람회 업무 관련해서 배우고 싶다고 했었죠? 작년에 보니까 강 은정 대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업무 처리를 잘했던데, 앞으로 강 은정 대리를 지원하면서 하나씩 배워보도록 해봐요."

유 성미 대리는 정 유혜 부장의 단호하고 강압적인 표정에 모기만 한 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부장이 사라지자마자 울 듯한 표정을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로 김 대리가 다가왔다.

"와. 이거 뭐예요?"

은정은 분석한 자료를 통해 답을 내놓았다.

"우리 부장님 여우 퇴치자였어요."

"여우 퇴치자요? 아, 여우 퇴치자. 하하하."

김 대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올해는 유 성미 대리가 넘기는 업무 그냥 맡아야지 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유 성미 대리, 대리님한테 넘긴 거 말고도 한다고 손 들었던 일 많을 텐데, 앞으로 고생 꽤나 하겠어요. 지금 부장님 통해서는 업무 못 넘길 거 같은데요. 하하하. 이러면 안 되는데, 일 년 동안 쌓인 뭔가가 뻥 뚫린 기분이에요. 나 앞으로 우리 부장님 사랑할 거 같은데요."


은정은 업무는 늘었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은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 군의 아르바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