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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May 20. 2023

여왕의 계단

짧은 이야기(소설)

오늘은 나의 대관식 날이다.

오직 이 날만을 위해서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나는 온갖 보석으로 화려한 꾸려진 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가 들던지 상관없이 최상으로 준비하라고 지시했던 드레스였다. 역시나 드레스는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내 품격에 맞지.' 

세상에서 가장 품격 있는 걸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 나는 오늘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오늘 여왕이 될 것이다.


대관식 준비의 마지막으로 특수 제작된 금색 테두리를 가진 붉은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목 앞으로 늘어진 금색으로 수 놓인 끈을 가볍게 묶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잠시 후, 공작부인이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공작부인의 손을 잡고 우아한 동작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대관식이 진행되는 대성당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 마차 안의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나의 대관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전대 여왕의 폭정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했다. 그래서 새로운 여왕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들었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충족하는 여왕이 될 자신이 있었다.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가 점점 사그라질 무렵 드디어 대성당에 도착했다는 전언이 들려왔다.

“조심히 내리십시오. 폐하.”

폐하라, 몹시 기분 좋은 말이다. 특히, 공작부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공작부인은 사교계의 꽃이었다. 나는 공작부인을 볼 때마다 감탄했고, 언젠가는 공작부인처럼 되리라 꿈꿨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공작부인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반짝거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공작부인의 수수한 드레스를 힐끗 보고는, 화려한 내 드레스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폐하?”

내가 움직이지 않자, 나의 우상이었으며, 모든 여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공작부인이 내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불렀다. 공작부인뿐만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를 숙인 적 없다던 왕가의 사람들과 고위 귀족들이 모두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우아하게 대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성당 제일 안쪽까지 걸어가자, 대주교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대주교 앞에 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신이 주는 왕관과 보주를 받아 들었다.

 “폐하.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았습니다. 대성당 계단을 오르시어, 왕좌에 착석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대주교의 말에 대성당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왕좌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오롯이 혼자 올라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나는 계단 위로 한 걸음 내디뎠다.


첫 번째 계단에 올라섰다.

전대 여왕의 대관식 때 나는 고작 열 살이었다. 하지만, 전대 여왕의 무례함 정도는 알 수 있을 나이였다. 전대 여왕이 대주교에게 넘겨받은 보주를 무겁다며 옆에 있던 귀족에게 넘기는 것을 보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대주교는 당황했다. 대관식 때 보였던 전대 여왕의 행동은 여왕의 집권 내내 입방아에 올랐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여왕의 폭정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계단에 발을 디뎠다.

여왕의 불임 소식이 알려진 직후,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두 부류였다. 왕위 서열 순위가 높다는 이유로 잘 보이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과 반대로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 여왕이 보낸 사람들. 처음에는 두 부류를 구별하기 위해 애쓰다가 나중에는 모두를 경계했다. 내게는 여왕을 제외하고 유일한 사촌이었던 캐서린이 최측근의 배신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더욱더 예민해졌다. 나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나를 낳은 어머니조차도 믿지 않았다.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전대 여왕이 나를 찾아왔다. 전대 여왕은 내게 경고했다.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거만하게 내뱉는 전대 여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심장 안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결심했다. 절대로 여왕이 준 수치를 잊지 않겠노라고.


세 번째 계단에 올라섰다.

전대 여왕의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귀족 간의 분열이 일어났다. 여왕이 양녀로 삼았던 어린 공녀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측과 여왕의 하나 남은 사촌인 내가 다음 왕이 되어야 한다는 측의 싸움이었다. 난리통에 나는 두 번이나 독살당할 뻔했다. 그 일로 그나마 마음을 내줬던 측근을 두 명이나 잃었다. 나는 분노했다. 전대 여왕의 양녀가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공녀는 내가 왕위를 차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정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녀는 나를 죽이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나는 한 번에 성공했다. 공녀의 죽음으로 나는 유일무이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네 번째 계단에 발을 디뎠다.

전대 여왕의 병이 점점 깊어졌다. 전대 여왕은 더 이상 집무를 볼 수 없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전대 여왕의 업무를 대행했다. 이제 곧 나는 여왕이 될 것이기에, 귀족들에게 대관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했던 일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아직 힘을 잃지 않았던 전대 여왕의 측근들이 여왕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대관식 준비를 할 수 있느냐고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대행업무 역시 그만두라는 반발에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누워있어야 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반대하는 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하지만, 아직은 힘이 없었다. 지금의 내 자리는 전대 여왕의 폭정에 반대하던 귀족들의 힘으로 지켜낸 자리였다. 그들은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확실한 내 편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장 힘이 센 가문의 남자의 정략결혼을 했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강한 힘이 필요했다. 결혼 후, 나는 남편 가문의 힘을 빌려서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기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다섯 번째 계단에 올라섰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왕좌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대 여왕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전대 여왕의 죽지 않으면, 나는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고민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황당했다. 나는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는 삶을 위해서 힘겹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란 사람이 지지는 못해줄 망정, 딸의 앞길을 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전대 여왕의 이모였다. 나는 어머니를 도성 밖으로 내쳤다. 그리고 오랜 고민이 무색하게 단번에 여왕을 제거했다. 이제 나는 진정한 여왕이 될 준비를 마쳤다.


여섯 번째 계단이 보였다. 

나는 보주를 지팡이 삼아서 힘겹게 올라섰다.

내가 전대 여왕처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충격이었지만,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혈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남편의 가문에서 어린아이를 입양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을 조용히 제거해 나갔다. 전대 여왕처럼 당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지지대 삼아서 나는 죽을 때까지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소문이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대 여왕의 불임 이유가 전대 여왕에게 양녀를 내밀었던 가문, 바로 남편의 가문에서 뒷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라는 소문이었다. 나는 면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남편이 기력을 회복시켜 준다며 밤마다 주던 차를 기억했다. 남편은 결혼 후, 처음으로 내가 타준 차를 마시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리고 양녀와 남편의 가문도 소리소문 없이 제거했다. 이제 내 왕위를 위협할 정적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곱 번째 계단을 앞에 두었다. 가까운 곳에 왕좌가 보였다. 이마에서 내려온 땀방울이 볼을 지나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어깨의 망토가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다. 하지만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어깨의 망토를 힘껏 부여잡고, 보주를 지지대 삼아 계단을 올랐다.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왕좌가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왕좌에 기대었다. 이제 다 끝났다. 


나는 결국 여왕이 되었다.


왕좌에 앉아서 가쁜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다스릴 사람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전대 여왕의 양녀였던 어린 공녀였다. 그리고 곧이어 죽은 남편과 한 때는 애지중지했던 내 양녀도 보였다. 전대 여왕과 얼굴도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개를 빤히 들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외쳤다.


"내가 여왕이다. 바로 내가 여왕이다."


잠시 후, 저 멀리 화려한 드레스를 치렁치렁 늘어트리고 반짝이는 보석이 촘촘히 박힌 왕관을 쓴 혈기 왕성한 젊은 여자가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왕좌에 철퍼덕 앉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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